- 책장을 통해 사람을 보는, 작가 한인규의 그림이야기 [헬레나의 그림이야기 ⑥]
- 입력 2013. 02.18. 08:38:04
- 그림의 소재가 되는 대상 중, 우리 삶에서 가장 친숙한 소재 중 하나를 떠올리자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앞서 다룬 작가들 중 채성필 작가는 ‘흙’을 주된 소재이자 재료로 하여 작업을 했고, 이동욱 작가는 ‘풍선’을 그렸으며, 이만나 작가는 ‘익숙한 풍경 속의 특별함’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이들 다음으로 소개해 드릴 한국 화가는, 우리 모두가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 까지 가장 많은 지혜를 얻는 것, 바로 ‘책’을 작품의 주된 소재로 하여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한인규 작가인데요. 시공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어떤 책을 많이 읽느냐를 파악하면 그 시간과 장소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가 보이죠?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 철학, 사람들의 마음속에 잔존하고 있는 불안 요소, 혹은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트렌드 등 그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집중하고 있는 주제를 알아보려면 서점에 가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일 것 같아요. 이렇듯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평범하지만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금껏 만들어 온 포트폴리오를 보여준 한인규 작가. 그 분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요?
[그림을 통해 텍스트를 전하다]
그림은 텍스트가 변형된 형태의 집합이라는 얘기도 있고, 텍스트를 그림 안에서 나타내는 것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죠. 그렇기에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여러 가지 내용들을 중의적으로 나타내거나 하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한인규 작가는 텍스트를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표현하여 복합적인 것으로 승화시킨, 하나의 ‘목적’으로서 대상화 하고 있어요.
그림이 텍스트로 인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인해 텍스트가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최근 서울의 더 케이 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 방문한 영국인 콜렉터의 눈에 띄어 채택된 연작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책과 관련 이미지들을 모아 한자어로 형상화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미술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극사실주의는 지양하고, 사실적으로 나타낸 이미지들 속에 상징의 장치를 배치해놓은 한인규 작가의 작품을 보면, 곳곳에 숨겨 놓은 메시지들을 찾아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요. 책들 하나하나에 모두 제목이 붙어 있고, 한자 한 글자씩으로 된 개별 작품들에는 그 한자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가 책 이외의 장치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언어에 작가 본인의 생각이 담겨 보다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인의예지(仁義禮智)란 알려져 있다시피 유교 사상의 한 기틀을 이루는 핵심 이념이죠. 한인규 작가는 그러한 사상적 조류가 ‘과연 맞는 것일까? 과연 옳을까?’라는 의문이 들어 이 작품의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해요.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의예지라는 뜻과는 모순되는 제목의 책들이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렇듯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작가 본인의 현상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습니다.
[텍스트 이면의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 매우 독특하죠? 언뜻 보면 도대체 무슨 문자를 책으로 형상화 한 건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로마 숫자 2, 8, 4, 8을 통해 ‘이판사판’을 그려냈다고 하는 작가의 설명을 통해,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과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해 나타내는 본인의 작품에서, ‘인의예지’ 연작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것과 그것이 나타나는 현 세계에서의 괴리를 표현하고 있어요. 이렇듯 나타나는 현상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이판사판’이예요.
‘이판사판’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어원을 아시나요? 우리는 보통 무언가 뾰족한 대안이 없을 때 무의식적으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만큼, 매우 부정적이고 현재의 그 뜻처럼 ‘될 대로 돼라’라는 의미 정도로 알고 있어요.
“그래, 이판사판이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라는 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조선이 건국되던 초기 불교 탄압 정책이 매우 거세어지자 불교 신자들은 그 탄압의 세력을 피해 각기 살 길을 찾아야 했던 것에서부터 생겨났어요. 산으로 들어가 참선과 독경을 통해 불교 정신을 계승하려 했던 이들을 가리켜 ‘이판승(理判僧)’이라고 했고, 탄압을 피하지 않고 절에 남아 모든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려 했던 이들을 ‘사판승(事判僧)’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판사판’이라는 용어의 어원이죠.
이판(理判)을 하던 사판(事判)을 하던 결국 종교를 지키는 길은 하나라는 말이 ‘이판사판’의 참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는 ‘이판사판’이 마치 막다른 상황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승패를 가르는 듯한 말로 쓰이고 있으니, 본래 어원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는 현 세계의 모순은 뭘까요? 한인규 작가에 따르면, SNS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해요. 페이스북(Facebook) 같은 SNS는 사람들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열린 광장’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 속에서도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진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늘 행복한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을 게재하는 누군가가, 정작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되기는 쉽지 않아요.
[역설과 이중성, 그 두 가지를 책으로 표현하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게 포장된 것의 이면에 무언가 감춰진 진실이 있다는 것을, 한인규 작가는 ‘책’이라는 주된 소재를 통해 나타내고 있어요. 한자어를 표현한 작품들만 소개를 해 드렸지만, 영어 단어를 나타내며 그 이면의 숨겨진 뜻에 대해 고찰한 작품도 있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거장들의 명화들 또한 책으로 그리며 사람들에게 비치는 남녀의 이미지에 관해 고찰한 작품도 있고,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작가 본인의 품는 의문을 텍스트를 기반으로 표현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인규 작가는 ‘역설과 이중성(paradox and dupilicity)'에 관한 스스로의 생각을 그림 속에 많이 표현하고 있는데요. 한인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때에나, 미술 작품이 그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림도 “화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집약체”라는 생각으로 그 속에 담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면, 어떤 그림이든 ‘부담스럽거나 어렵고,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제 글을 보며 읽듯, 많은 화가 분들의 그림도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더욱 한국 청년 작가 분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늘 부딪히는 ‘역설과 이중성’이라는 테마를, 우리에게 친숙한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표현하는 한인규 작가의 작품이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각자 살고 있는 집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를 돌아보며, 그것이 한인규 작가의 그림들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는 것. 재밌지 않을까요?
글: 헬레나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faithmyth@hanmail.net/ blog.daum.net/faithmy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