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병신체’와 우리 글 바로쓰기
입력 2013. 03.04. 15:50:56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한번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으로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우리말 연구가 이오덕 선생. 2003년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43년간 몸담은 교직을 나와, 일반인과 지식인 모두에게 널리 퍼진 번역 또는 일본 말투의 잔재를 정화하기 위해 1992년 ‘우리문장 바로쓰기’를 집필했다. 한편 헤밍웨이 번역가로 유명한 한국외대 김욱동 교수 역시 일본어 중역 문화에 대한 질문에, “번역이란 문화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문화에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에 글과 강연으로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가 블로그에 ‘보그 병신체’를 언급했다. 병신이란 말이 주는 비하적 표현처럼, 이는 사대주의에 빠진 매체에서 보이는 현상으로, 특히 패션계에서 출발해 각종 외국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는 국적불명의 표현을 비꼬는 뜻이다.
“이번 스프링 시즌의 릴랙스한 위크앤드” 또는 “홈 메이드 베이크된 베이글에 까망베르 치즈를 곁들인 샐몬과 후레쉬 푸릇과 함께 딜리셔스한 브렉퍼스트를 즐겨보자” 등 이미 이런 표현은 차고 넘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보그가 대표적인 패션 매체이기에 이름이 붙은 것일 뿐, 엘르나 하퍼스 바자 등도 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가 지적한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패션 저널리즘의 관행이 여행이나 음식을 전문으로 다루는 매체로까지 점점 번지고 있다는 것.
물론 어느 조직이나 그들 특유의 어투나 화법이 존재한다. 대학시절 학교 후문 앞에서 자주 마주 쳤던 운동권 학생들은, 그들의 스타일만큼이나 독특한 ‘사투리’로 이질적인 느낌을 주곤 했다. 또 기자들 역시 경찰서나 병원을 돌며 사건을 취재함을 뜻하는 일본어 ‘마와리’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몇몇 분야를 중심으로 범람하는 무분별한 외국어 앞에, 이미 많은 이가 불쾌감을 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사라다를 먹고 자란 기성세대가, 어느 날 외국어로 적힌 수많은 드레싱 앞에 아찔함을 느끼는 것처럼.
이런 볼썽사납게 쏟아지는 표현 중에도 간혹 초정 약수처럼 청량한 의견을 마주하게 된다. 얼마 전 한 매체와 인터뷰를 가진 지큐 코리아의 이충걸 편집장은 “타이포가 미술로 보이는 역할을 할 때나, 스타일, 타이, 택시처럼 한국말로 바꾸기 애매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어를 안 써요. 저는 조선의 지큐를 만든다는 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라고 당당히 설파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염된 언어가 이미 패션계를 넘어 다른 곳까지 횡행한 현재 상황은, 결국 어려운 메뉴판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이거 주세요”라고 읊조리는 것처럼 마땅한 답이 없어 보인다.
학계의 여러 분야를 비롯해 가령 미술평론 역시 들뢰즈나 푸코 등 몇몇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와 관련한 어색한 표현이 빠진 글은 찾기 힘든 지경이 됐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번역을 포기한 언어는 결국 아무리 익숙한 개념이나 담론도 진정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오래전 ‘맥도날드’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을 희화하는 농담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퍼진 적 있다. 하지만 비록 외국어 발음이 어눌한 그들일지라도, 여전히 일본은 세계적인 출판강국이자 선진국이다. 우리의 경우 유명한 외국 고전 작가라도 겨우 대표작만 직역된 반면, 이미 그들은 세세한 작품까지도 자국어로 번역해 흡수했다. 그리고 그런 힘과 다양한 출판물들이, 일본을 여러 분야 특히 패션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스타를 길러낸 또 다른 이유는 아닐까.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보그 코리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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