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산복이 일상복, 패션 변화로 시대를 읽는다
- 입력 2013. 03.06. 10:49:23
-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한 장면에는, 한강변을 걷는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플라스틱 썬캡을 착용하고 팔을 휘저으며 걸어온다. 이 기괴한 모자는 이미 호기심을 넘어, 해외 클럽에서 사용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끈 바 있다. 또 최근 한 패션쇼의 소품으로도 사용되며, 대한민국의 아줌마 스타일은 어느새 우리의 흉을 넘어 누군가의 패션으로 자리 잡았다.그러나 K-fashion 수출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패션도 있다. ‘온 국민의 등산복화’가 된 아웃도어 패션이 그렇다. 한때 중고생 사이에서 특정 등산용품의 패딩 점퍼를 놓고 편을 가르는 것이 큰 사회문제가 되었었다. 세월과 브랜드는 다르지만 그런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씩 갖고 있기에, 아마 처음에는 그 뉴스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제품을 입은 학생들이 못 입은 아이들을 도태시키고, 또 같은 브랜드라도 가격에 따라 줄을 세운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담함을 주기 충분했다.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대리주차를 맡기는 차종에 따라. 혹은 들고 가는 가방에 따라 상대방의 태도가 변하더라는 어른들의 경우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금력의 쓴 맛 대신,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야할 청소년들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원래 가격이 높은 등산용 패딩은 세계적으로 높은 봉우리에 가는 산악인의 필수품이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비싼 외피만 입혔을 뿐, 함께 정상을 향하고 때로는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팀을 생각하는 ‘정신’은 채워주지 못했다. 이는 현재의 우리들이 이웃 혹은 동료와 함께 하는 삶 대신, 혼자 먹고 살기도 바쁘다는 반증이다.
이런 세태의 출발은 1997년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면서부터 심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 불황으로 잇따라 기업들이 도산하고, 출근할 곳이 사라진 우리 가장들은 더 큰 절망 속에 양복을 입고 일터 대신 가까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입장은 수양산을 찾은 백이숙제나 여말선초의 두문동 72현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 대부분은 개인이 아닌 ‘조직’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회사원들이었다. 그렇게 사회와 국가에서 버림받고 혼자가 된 그들이, 도산 하는 직장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동네 뒷산이었다.
이후 IMF를 졸업하고, 2000년대 중반 골디락스라 불리는 전 세계적 호황이 찾아왔지만, 정리해고, 비정규직 등 한 번 무너진 근무조건은 갈수록 강퍅해졌다. 또 이제는 여성들까지 ‘자아실현’이 아닌 ‘가계구현’을 외치며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절망 혹은 지갑이 얇은 기성세대의 휴식처가 된 전국의 산은, 평일과 휴일 가릴 것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서서히 등산복 차림으로 거리와 마트 그리고 동네곳곳을 활보하는 산악인들이 하나 둘 눈에 띠더니, 어느새 자연스러운 평상복으로 우리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마치 대한민국의 도시와 산간벽지 모두가 곧 등정을 앞둔 ‘베이스캠프’가 된 것이다. 일제시대 ‘국민복’이나 군사정권 시절 ‘공무원 신생활복’ 등이 위에서 하달된 지침이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이 등산복 차림은 분명 자발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이런 패션을 바라보는 젊은이들과 비싼 패딩을 입은 그들의 자녀들은 이를 창피하게 생각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나눈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아저씨들의 말발굽 같은 구두나 스팽글 박힌 타이, 혹은 뽀글이 파마를 한 아주머니 등. 수입과 차림은 종종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몇 년 새 폭발적으로 성장해온 아웃도어 시장과, 평일에도 버젓이 등산복을 입고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기성세대의 차림에는, 팍팍한 현실과 자기를 돌보는데 인색한 우리의 현실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차평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