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비가 뭐길래...” 샬린 위트스톡 열풍과 그레이스 켈리 [패션다큐 ⑤]
- 입력 2013. 03.24. 11:09:48
-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케이트 미들턴과 샬린 위트스톡. 최근 패션계에서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두 명의 여인이다. 윌리엄 왕자와 결혼한 케이트 미들턴의 의상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또 알베르 2세와 맺어진 샬린 위트스톡 역시 지느러미 대신 막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인어공주처럼 압도적인 미모로 유명하다. 우리 포탈에서도 그들이 차려입고 나타난 행사장 풍경이 늘 상단 화면을 장식할만큼 익숙한 인물로 떠오른다. 그 정도가 지나쳐 마치 어느 왕국의 신민이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두 사람 모두 훤한 얼굴의 왕손과 결혼했으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똑같이 교통사고로 떠난 시어머니를 두고 있다. 더욱이 샬린 위트스톡을 앞세운 모나코의 부각은 새롭다. 모나코는 유럽에 있는 작은 공국으로, 유럽과 세계의 주권 국가 중 바티칸 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영토가 작은 도시 국가다. 그리고 그 모나코에는 바로 그레이스 켈리가 있었다.
모나코는 1297년부터 지금까지 그리말디 가문이 통치하고 있다. 이 나라는 영토 문제로 1701년부터 군 보유를 포기했고, 지금도 국방권은 프랑스에 위임돼 있다. 1861년 프랑스-모나코 조약으로 주권이 인정됐으나, 1918년 모나코 공위를 더 이상 계승할 사람이 없을 경우 프랑스에 합병된다는 조약이 체결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군과 나치 독일군에 점령당하기도 했다.
한편 알베르 2세의 어머니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 성사에는, 당시 모나코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선박왕 오나시스의 지혜가 큰 이유를 차지했다. 이때 레니에 3세는 31살 독신에 후사도 없어 모나코는 프랑스에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 또 2차 대전이 끝난 직후라 피폐해진 유럽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 모나코는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반면 승전국 미국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떠오르며 그 부를 자랑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오나시스는 레니에 3세에게 아름답고 우아한 미국 여배우와 결혼을 통해 공국을 지킬 것을 권유했다.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켈리는 1954년 영화 ‘시골 소녀’(The Country Girl)에서 빙 크로즈비의 촌스러운 아내 역으로 출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같은 해 오나시스의 각본 아래 그레이스 켈리는 화보 촬영차 모나코를 방문했고 레니에 3세를 만난다. 이후 레니에 3세는 그레이스 켈리에게 청혼하며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건넸다. 영화 ‘상류사회’에 이 반지를 끼고 출연한 그레이스 켈리는, 1956년 4월 레니에 3세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왕비가 된 후, 오나시스의 예상대로 미국인들의 모나코 여행이 늘어나며 모나코의 관광수입은 급증했다. 결혼 후 은퇴한 켈리는 캐롤라인 공주와 알베르 왕자 그리고 스테파니 공주를 낳고 살다,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력셔리의 환상이 필요한 명품업계에 당시 그레이스 켈리처럼 좋은 배경을 가진 주인공도 없었다. 공식 석상에만 나타나는 그레이스 켈리는 늘 뉴스가 됐고, 그의 머리와 의상 및 장신구는 전세계로 타전됐다. 그가 들었던 어느 명품 업체의 가방은 '그레이스 켈리'백으로 여성들의 전설이 됐다.
럭셔리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룩스(lux), 바로 빛이다. 사람들은 왕비의 삶을 시작한 그레이스 켈리를 동경했지만, 그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우아함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까닭은 결혼 후에도 철저한 자기관리로 조용히 왕실생활을 한 것이 큰 이유를 차지했다. 화려했던 배우 생활만큼이나 소박한 일상을 가꿨던 삶이야말로, 시간이 무색한 그레이스 켈리의 아름다움이자 행복의 본질이었다. “성공이나 명성도 나눠 가질 상대가 없으면 허무할 뿐이다”라고 했던 말년의 그의 말처럼.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뉴시스 제공, 영화 '나는 결백하다'중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