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세 디자이너, 재능과 특혜(?)가 만들어낸 시너지
- 입력 2013. 04.19. 08:18:10
- [매경닷컴 MK패션 김희선 기자] 얼마 전 디자이너 이상봉의 아들 이청청이 이끄는 브랜드 ‘라이’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팝업스토어 오픈 행사를 가졌다. 롯데본점과 신세계 강남점에 이어 계속되고 있는 라이의 행보는 팝업스토어이긴 하지만 신인 디자이너로서 결코 쉽지 않은 대형백화점 입점으로 눈길을 끈다.2003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해 온 이청청은 “라이는 이상봉의 감각을 보다 대중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어포더블 럭셔리를 추구한다. 10년 전부터 아버지의 유명세로 부담감을 느껴 왔지만 차츰 그 부담은 줄어들고 있다. 훗날 아버지의 나이가 될 때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 지금이 아닌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와 비교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한 후 그래픽 디자인과 미디어 분야에서도 일했지만 결국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남성복을 공부하고 패션업계로 뛰어든 이청청은 정규매장 오픈을 목표로 준비에 한창이다. 한편 그의 여동생 이나나는 브랜드 이상봉과 라이의 전체적인 디자인에 관여하고 있는데 특히 이상봉 뉴욕 쇼룸과 갤러리를 관리하며 패션과 문화를 접목시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파리에서의 꾸준한 활동으로 2008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국가훈장을 받은 디자이너 문영희에겐 아들 김무홍이 있다. 그는 ‘문영희’의 디자이너를 거쳐 지난해 10월 ‘무홍’을 론칭했다. 지난 1월 파리 ‘후즈 넥스트'와 2월 뉴욕 코트리 전시에 이어 3월 서울패션위크 패션페어에 참가하며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그는 5월 미디어아트공연 ‘레플리카’의 무대의상을 맡아 작업에 한창이다.
정치학 박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김무홍은 “콘셉트를 풀고 리서치하는 과정은 연구와 컬렉션의 공통된 부분이다. 특히 하나의 쇼를 만드는 과정에서 예쁜 옷만을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 예쁘더라도 전체 콘셉트의 메시지 전달을 위해 컬렉션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2012년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노팅험대학교의 연구교수로 임용됐지만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에 따르면 ‘무홍’의 의상은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가깝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은 실용적이면서도 전위성이 녹아 있으며, 어느 정도 문영희의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현재 33세인 그는 앞으로도 연구와 컬렉션을 같이 진행할 예정으로, 계층 간 관계를 분석하는 그의 연구 분야를 언젠가 패션에서도 시도하고 싶다고 밝혔다.
2세 디자이너의 계보는 이신우-박윤정, 진태옥-노승은, 이영희-이정우, 김행자-박지원, 트로아조-한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윤정과 노승은, 이정우, 박지원, 한송은 2세 디자이너의 1세대인 셈. 이들은 어머니와는 독립적인 브랜드로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1990~2000년대 초반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중 박윤정은 지난 3월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진태옥 컬렉션 백스테이지에선 디자이너 노승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2세 디자이너로는 2004년부터 컬렉션을 발표한 이주영과 송자인이 있다. 설윤형의 딸 이주영은 브랜드 ‘레쥬렉션’을 통해 정교한 테일러링과 강인한 남성성이 돋보이는 컬렉션으로 확고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온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길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송자인은 클래식과 페미닌이 적절히 결합된 작품으로 성공적인 독립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디자이너 김동순의 딸인 그는 지난 5일 용산구 한남동에 콘셉트스토어 ‘모 제인송(MO jain song)’의 문을 열었다. 의상뿐만 아니라 가드닝을 포함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할 수 있는 멀티숍을 통해 송자인은 ‘에코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다.
한편 디자이너 유혜진이 어머니 오은환의 ‘꾸망’에서 비롯된 브랜드 ‘쿠만’을 물려받은 지 올해로 3년째다. 그는 오은환의 혁신성과 전통은 물려받되 보다 젊고 엣지 있는 컨템포러리 브랜드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이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한 의상제작과정과 패션쇼라는 환경 속에서 그들이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해외 유명 패션스쿨에서의 교육, 그리고 미디어의 관심이 모아져 일단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유난히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유명 디자이너의 자녀로 태어난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함인 것도 사실.
이에 대해 이상봉은 “혜택이라기보다는 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상당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 역시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해야만 나보다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2세 디자이너 대부분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함에 따라 역으로 부모의 브랜드가 세대교체에 어려움을 겪는 일 또한 아쉬운 부분. 서울패션위크에서 만난 이상봉은 “파리에서 내가 아닌 젊은 디자이너에 의해 이상봉 쇼를 여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며 세대교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알버 엘바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영입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랑방과 발렌시아가처럼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2세로의 자동적인 ‘세습’이 아닌, 브랜드의 콘셉트를 이어나갈 신인 디자이너 영입이라는 신선한 뉴스를 기대하기란 힘든 일일까.
[매경닷컴 MK패션 김희선 기자 news@fashionmk.co.kr/사진= MK패션DB, 무홍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