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시민혁명과 공항패션의 원조 이승만
- 입력 2013. 04.19. 14:30:22
-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에 반발한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편 이 2·28 대구 학생의거는 두 달 뒤 4·19 시민혁명의 실마리가 됐다.3월 15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이를 강경 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의 분노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임명되는 등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홍진기는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 생활을 했다. 이후 4·19 시민혁명을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사건으로 모는 등 이승만 독재정권 부역 행위로 공직에서 물러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을 감형돼 석방됐다. 이후 삼성회장이자 훗날 사돈 관계를 맺게 될 이병철의 멘토로 중앙일보사와 동양방송의 대표이사 및 회장을 지냈다.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돼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검시 결과가 발표됐다. 한편 이 시신으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한편 4월 18일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임화수 등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해 4·19 시민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결국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고 당일 오후 4시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4·19 시민혁명 후 이화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복 차림에 썬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중절모를 쓴 이승만은, 결국 5월 29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 허정에 의해 김포공항에서 부인과 함께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망명했다.
[매경닷컴 MK패션 차평철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위키디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