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홍립스틱에서 긴생머리 그녀까지, 가요 속 노랫말에 담긴 미(美)의 흐름
- 입력 2013. 05.06. 07:04:55
- [매경닷컴 MK패션 김희선 기자] 1975년, 듀오 둘다섯의 데뷔곡 ‘긴 머리 소녀’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
그로부터 38년 후, 6명의 청년으로 이루어진 그룹 틴탑은 ‘긴 생머리 그녀’를 외친다. 용감한 형제가 작사한 이 노래는 우연히 만난 긴 생머리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이미 그녀에겐 애인이 있다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달라진 점이 있다면 75년의 그녀는 ‘달처럼 탐스런 하이얀 얼굴’의 소유자였다면 틴탑의 그녀는 ‘화장기가 없는 쌩얼까지 예쁜’ 완벽한 여자다. 70년대 둥글고 탐스런 얼굴형이 주목받았던 점에 비해 누구나 화장하면 어느 정도의 미모를 유지하는 요즘은 완벽한 ‘쌩얼’까지 요구하는 시대다. 하지만 두 노래 공통적으로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비가 내릴 때면 유난히 생각이 나는’ 긴 생머리를 예찬한다.
빛과 소금의 ‘샴푸의 요정’(1990)에도 이 여인은 등장한다. ‘너울거리는 긴 머리 부드런 미소로 속삭이네’와 같이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이들은 긴 머리 여성을 노래한다. 2008년 2PM은 ‘10점 만점에 10점’에서 ‘그녀의 다리는 멋져 날리는 머릿결’을 외치며 10점 만점의 여자(?)가 되기 위해선 머릿결까지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오랜 시간 즐거움과 위로를 주며 대중과 함께 해 온 우리 가요. 노래에 담긴 가사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이는 맏며느리 같은 복스러운 얼굴이기도 했다가 커다란 가슴, S라인이기도 하지만 그중 ‘긴 머리’ 예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사실 여성의 긴 머리는 샴푸광고 속 모델처럼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아니라면 청승맞고 처량하기 십상이다. 왜 비가 오면 더 생각나는지 알 길은 없으나 비까지 맞으면 대책이 없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사회성 없어 보이는 긴 생머리를 이상형 모범답안으로 고정시킨 채 수십 년 동안 부르짖는 건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이기 때문일까 단지 소재의 부족일까.
하지만 남자들의 이런 로망 때문인지 여성들 또한 가장 쉽고 편하게 고수하는 스타일인 긴 머리. 프랑스 ‘보그’의 편집장을 거친 패션 스타일리스트 카린 로이펠트는 나이 든 여성이 절대 하면 안 되는 스타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꼽았고, 늘 경쾌한 단발머리를 고수한다. 그런가 하면 등의 브래지어 끈까지 닿는 길이가 가장 예쁘다며 학창시절부터 변함없이 그 길이를 유지하는 40대 주부도 있다.
물론 조용필의 ‘단발머리(1980)’와 김건모의 ‘첫인상(1992)’처럼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을 외치는 노래도 있다.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는 두발자유화가 시행된 1982년 이전이므로 개성을 살린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어린 소녀를 상징하는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반면 김건모의 노래에 등장하는 ‘짧은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여성은 90년대 초반 X세대의 개성과 통통 튀는 발랄함을 대변한다.
그런가 하면 윤건은 2003년 ‘갈색머리’에서 머리카락의 길이보단 컬러를 강조했다. 하지만 ‘흩어진 갈색머리 바람에 젖어’란 부분으로 볼 때 짧은 머리는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화장의 경우는 어떨까. 나훈아는 ‘붉은 입술(2003)’에서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던 잊지 못할 붉은 입술을 노래한다. 홍수철은 ‘장밋빛깔 그 입술(1988)’에서는 ‘입 맞추고 싶은 듯 그려있는 장밋빛깔 그 입술’이란 가사로 붉은 입술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표현했다. 신효범은 ‘슬플 땐 화장을 해요(1993)’에서 ‘조금은 우울한 우리의 사랑에 빨간 장미꽃이 되어 그대의 표정을 밝게 하고 싶네’라며 기분전환용 화장을 제안한다.
한편, 긴 머리와 화장이 실연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2007년 발표한 버블 시스터즈의 ‘긴 머리’와 데이라이트의 ‘머리를 자르고(2007)’, 신소희가 부른 ‘짧은 머리(2008)’는 이별로 아파하는 여인이 긴 머리를 자르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여성은 미의 표현방식보다는 마치 사진을 불태우듯 사랑했던 시절과 이별하는 일종의 의식으로 긴 머리를 이야기한다. 이런 감정은 왁스 ‘화장을 고치고(2001)’와 2005년 렉시는 ‘눈물 씻고 화장하고’에서의 내용과 연결된다. 노래 제목만으로도 쓸쓸하고 처량 맞은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
강애리자의 ‘분홍립스틱(1988)’은 사랑의 시작과 함께 바르던 분홍립스틱을 이별을 앞두고 지운다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며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1993)’는 짧은 사랑을 안타까워하는 결연함마저 풍긴다. 강진 역시 ‘화장을 지우는 여자(2005)’에서 ‘핑크빛 입술을 그리다가 뜨거웠던 추억에 젖어버렸나’라며 화장하다 추억에 눈물짓는 여성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노랫말에서 등장하는 화장 역시 표현만 다를 뿐 빨강과 분홍 즉 붉은 계열에 한정되는 편이다.
머리스타일과 메이크업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유행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노랫말에 등장할 정도로 남성에게 어필하는 것은 여전히 긴 머리에 붉은 입술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뭐 그렇다고 가요에서 보브 컷과 바디 펌 또는 스모키 아이와 누드 립 등의 가사까지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유행은 이토록 변하는 가운데 40년이 되도록 긴 머리와 붉은 입술 일색인 가사는 조금 답답하다.
2011년 스티는 ‘화장하지 말아요’에서 흰 얼굴의 빨간 립스틱은 조커 같으니 맨 얼굴을 보여 달라고 노래했다. 2013년 3월 가수 돕선은 ‘묶은 머리 여자가 예뻐’란 노래에서 ‘어딨어 넌 묶은 머리 여자 멀리가지 말고 내게 와 편하게 머릴 묶고서’라며 드물게 포니테일 걸을 예찬했다. 스티와 돕선의 노랫말이 유독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매경닷컴 MK패션 김희선 기자 news@fashionmk.co.kr/사진=MK패션, photopark.com, 티브이데일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