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문영희, 프랑스가 인정한 고집스러운 열정 [인터뷰]
입력 2013. 05.10. 08:38:55
[매경닷컴 MK패션 김희선 기자] 10년 만에 다시 마주한 디자이너 문영희는 그대로였다. 조금 길어진 헤어스타일만은 제외하고.
“맞아요. 예전엔 1.5센티미터를 고수했는데 많이 달라졌죠? 늙었죠 뭐. 하하”
유쾌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맞아준 그는 여전히 소녀처럼 수줍어했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지난 7일 주한 프랑스대사관저에서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기사장(Chevalier de l`Ordre National du Merite)을 수훈 받은 패션 디자이너 문영희. 국가공로훈장 기사장의 심사기준은 생각보다 훨씬 엄격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예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파리에서의 활동 범위, 법인체 활동내용 등을 철저하게 점검한다.
훈장을 수여한 제롬 파스키에 주한 프랑스 대사는 훈장 수여에 앞서 그를 ‘프랑스의 오랜 벗’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고용을 창출하고 후진양성에도 힘써 온 문영희에 대해 프랑스가 추구하는 기업가정신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힘차게 표현하고 싶어요. 한국인으로서 파리에 체류하면서 한국과 프랑스의 두 문화와 감성을 혼합한 창작을 계속해 왔죠.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로 풍부해진 저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려고 늘 노력했어요”
1991년 파리에 정착해 1994년 법인회사 ‘문영희’를 설립하고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하면서 아름다움과 시상 그리고 활력을 재현해 온 문영희. 20년 넘도록 이어진 땀과 열정은 그가 입은 전위적인 검정 재킷에 달린 파란 훈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랑스 패션산업과 제가 잘 맞았어요.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작품에만 몰두하면 전문가들이 알아서 인정해주는 필드니까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디자이너가 나서서 홍보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게 안타까워요. 패션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주인은 난데 그 자리를 왜 연예인에게 내주는지 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사실 언젠가부터 브랜드 행사에도 연예인을 모시지(?) 않으면 취재진이 모이지 않을 정도로 패션산업은 연예산업으로 변질했다.
“창작이라는 작업 자체가 얼마나 존엄한 것인데 왜 그렇게 연예인에 의존하는지 정말 안타까워요. 물론 연예인이 자기가 좋아서 브랜드를 보러 오는 건 좋아요. 하지만 연예인에 의존해 얼마씩 돈 쥐여 주면서 그들을 모셔오고 그들 때문에 이쪽이 홍보가 된다는 건 잘못된 겁니다. 디자이너든 브랜드든 철저하게 작품으로 승부 봐야 해요”
그는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영원한 숙제, ‘패션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의견을 이어나갔다. 1986년 대학원 졸업 당시 한국 전통 복식의 선을 이용한 논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도해 온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
“이 역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창작이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것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고, 이 같은 모티프를 어떻게 자기화해서 표현하느냐가 중요하죠.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고 해야만 하는 의무에요. 컬렉션이란 건 한국만 바라봐선 안 되며, 국제적으로 모든 여성이 보고 공감대를 가지고 입을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고 신중을 기해 접근해야 해요”
1999년 3월 발표했던 컬렉션에서 그는 글자 ‘문’을 니트 톱 전면에 디자인해 넣었다. 단순한 그래픽인 줄로만 알았던 외국인들은 후에 이 패턴이 한글인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이 무대에서 조각보를 사선으로 배치해 연결한 작업은 아가일 패턴과 어우러지며 컬렉션에 훌륭히 녹아들었다.
패션의 본고장 파리를 사로잡은 그가 ‘무심한 듯 시크한’ 파리지앵 스타일의 원동력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감성을 잘 파악한 후 그와 조화시켜 입어야 해요. 자신만의 표현 방법으로요. 무엇보다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렇게 ‘나’에 맞춰 옷을 입으면 어디를 가든 내가 드러나면서 센스 있게 보이고, 감도도 높아지니 자연히 즐거워지지 않을까요”
덧붙여 SPA 브랜드가 몰고 온 패스트 패션의 트렌디한 흐름에 대해서도 조언을 남긴다.
“최신 유행 아이템을 저렴하게 입는 것은 큰 장점이에요. 하지만 자신만의 콘셉트 없이 크리에이터의 카피로 이루어진 옷만으로 하루하루의 스타일을 채워나가는 현상은 안타까워요. 오리지널리티가 없으니까요. 의상은 인품을 돋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지나치게 유행만을 좇고 그에 의존하면 가벼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좋아하는 크리에이터의 옷을 몇 벌은 갖고 SPA 제품과 섞어서 입으면 본인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카피에 대한 생각은 브랜드들이 안고 갈 숙제라고도 덧붙인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디자이너와의 활발한 협업으로 우리나라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디자인을 발전해나가면 국제적 진출도 더 쉬워지지 않겠느냐며. 오랜 세월을 다른 나라 브랜드의 카피에 써버리는 몇몇 브랜드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각종 패션, 예술계 인사들의 축하 꽃다발이 가득했다. 자리를 빛낸 1세대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이 그에게 “우리가 파리 가서 하려다 너무 힘들어 도로 들어왔잖아. 그런데 문 선생이 해냈어”라며 당신 일처럼 기뻐하셨다는 얘기에, 그리고 진태옥 선생이 보낸 화환 속에 있었다는 “개인의 자랑이면서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잘 지키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눈이 더욱 빛난다.
선배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낸 그는 이제 패션에 뛰어든 수많은 젊은이의 희망이기도 하다. 예전보다 월등히 좋아진 여건 속에서 외국 진출을 꿈꾸는 디자이너들에게도 현실적인 성공의 아이콘이 된 것.
“우선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를 솔직히 되짚어 보세요. 자신의 표현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해나가면서, 하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표현되고 있는지 점검하다 보면 어떤 줄기가 생길 거예요. 처음엔 가느다란 줄기겠지만 계속하다 보면 점점 굵어지면서 나만의 포지션이 확실히 보일 거예요. 그것이 우리네들의 작업인 것 같아요”
매 시즌 쉬지 않고 계속되는 창작의 고통. 그 고통이 아직도 그렇게 재미있다는 그는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하는 순간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난다 했다. 물론 열심히 하지 못해 침체하기도 하지만 그 감정을 겪지 않기 위해 또 온 힘을 기울인다고.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건축, 그림, 조각 등 순수예술을 접하며 휴식기를 보내고 또다시 몰두하는 창작의 세계. 예나 지금이나 묵묵하게 한 길만을 걸어온 그는, 언론 노출이나 유명세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했다.
“전 그저 제 일을 할 뿐이고 언론에 나서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해요. 언론에서 찾아와 만나는 건 좋은데 제가 일일이 쫓아다닐 순 없죠 그럴 시간도 없고. 전 그런 거엔 젬병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제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에요”
그림 같은 정원과 코를 찌르는 봄꽃향기가 인상적인 순간으로 기억될 늦은 봄 저녁. 대사관 언덕길을 내려오는 길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문영희 같은 디자이너를 한국보다 먼저 알아보고 대통령 훈장을 주는 사실에 오히려 놀라워했다는 프랑스의 반응에. 그리고 마크 제이콥스에 이어 이 훈장을 받은 그가 유력 포털사이트 인물검색에 이름조차 올라있지 않다는 사실에.
[매경닷컴 MK패션 김희선 기자 news@fashionmk.co.kr/사진=진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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