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패션 기업들의 이유있는 몰락
입력 2013. 07.08. 08:52:27

[매경닷컴 MK패션 조혜원 기자] 한 때 잘나가던 국내 패션 브랜드들이 대거 사라지고 있다. 국내 패션 브랜드 위기는 오랜 이슈지만 최근 잦아진 브랜드들의 소멸과 교체로 시장의 흐름이 완전히 바뀔 것으로 전망돼 귀추가 주목된다.
제일 모직은 올해 상반기 후 후부, 데레쿠니를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LG패션은 헤지스 스포츠를, 이랜드는 쏘베이직, 언더우드에 이어 콕스, 셰인진을 정리한다. 대기업은 브랜드를 자체적으로 정리하거나 축소하지만 중견기업, 중소기업들은 아예 부도가 나거나 기업 자체가 없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해외 브랜드들은 백화점에서 점점 더 메인 자리를 꿰차고, 유니클로, H&M 등 해외 SPA 브랜드들도 전년대비 매출액이 급상승하면서 매장수를 늘려나가고 있다.
국내 브랜드들의 부진이 단순히 패션계의 난항 때문이 아니라는 것. 이에 국내 기업들은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는 고급화 전략을, 국내 시장에서는 SPA 등 브랜드 콘셉트 전환으로 중저가 시장 공략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제일모직은 고급화하기 좋은 빈폴,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를 확대할 것으로 보이며, 이랜드는 로엠을 SPA로 전환하고 신발, 아웃도어 브랜드 슈펜, 루켄을 론칭했다.
하지만 패션 업계에서 함께 호흡을 해온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그 문제가 아니지 않냐’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패션계의 국내 브랜드 퇴출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소비자 모르게 패션 업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디자이너, MD들의 이야기
디자이너가 필요없는 카피, 사입 제품
2배에서 10배 이상 부풀리는 가격
악성 재고만 내놓는 세일 아닌 세일

대기업에서 근무했다는 A양은 “소비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국내 브랜드를 재구매하지 않을 것.”이라며 디자이너로 입사한 뒤 한 일의 90%가 시장 조사 즉 카피였다고 말했다. 백화점, 가로수길, 동대문에 나가서 영상을 찍어와서 그대로 베껴 옷을 만든다는 것.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우리는 카피라이터’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다.
카피하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라는 것이 이들의 얘기. 동대문에서 그대로 사입을 해서 일명 ‘택갈이’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택갈이란 동대문에서 물건을 사다가 브랜드 태그만 바꿔서 파는 것을 말한다. 국내 유명 브랜드들의 택갈이가 상상을 초월한다며, 아예 디자이너를 채용할 때 ‘동대문 사입 경력자’를 조건에 붙이기도 한다고. 이 태그 하나로 옷 가격은 2배에서 10배로 뛰어오른다.
또 동대문측에서는 대기업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가져가니까 가격을 낮게 책정하기 위해 염색, 열로 인해 천이 변형되는 것을 확인하는 공정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비싼 돈을 주고 브랜드 옷을 사도 몇 번만 빨면 옷이 축 늘어진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백화점에 들어가는 유명 브랜드 옷 중 많은 부분이 디자인은 명품 혹은 동대문과 같고, 원단의 질은 떨어지며 가격은 10배로 올라가는 것이다. ‘브랜드옷=비싼 보세옷’이라는 것이 이곳의 생리란다.
또 백화점의 60~70% 세일도 소비자들이 반길 일이 아니라고 귀띔했다. 애초에 가격을 책정할 때 할인율을 고려해 크게 부풀리는데다 파격적인 세일은 브랜드 내에서 ‘악성 재고’라고 부르는 작년, 재작년 제품만을 푼다는 것. 또 이런 옷은 창고에 오래 있어 원단의 수명이 다한 경우도 많다.
실정이 이렇다보니 기업에서는 능력있는 디자이너가 필요없다. 카피, 사입을 할 줄 알면 되니 단순 노동자 취급에 월급은 박봉이다. 경력 디자이너도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대기업에 들어갔다가 ‘디자인을 하기 위해’ 동대문으로 나오고 있다.

▼눈치챈 소비자들
백화점 한 층에 같은 디자인 옷이?
높은 가격, 기대보다 못한 퀄리티

그래도 브랜드는 퀄리티가 다를 것이라며 브랜드를 선호하던 소비자들도 이제는 다를 게 없다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평소 플라스틱 아일랜드 단골이라는 B양은 “한 번은 플라스틱 아일랜드 매장에서 예쁜 원피스를 점찍어 두고 구경을 하는데 같은 4층의 다른 브랜드에서 디테일까지 똑같은 옷을 봤다. 특이한 기하학 무늬 옷이었기 때문에 카피도 아닌 같은 옷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였는데 속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소비자인 C양은 “지하상가에서 산 코트를 입고 르샵 매장에 갔는데 직원이 ‘우리 옷 입으셨네요’라며 반긴 적이 있다. 살펴보니 단추까지 똑같고 태그만 달랐다.”고 경험담을 밝혔다.
또 다른 이들도 “국내 브랜드 옷 값이 너무 터무니없이 비싸다. 디자인도 SPA 브랜드 수준에 그치고 입다보면 질도 좋은지 모르겠다. 시급은 4~5천원인데, 티 하나에 5만원, 코트 한 벌에 30~50만원, 원피스가 20~40만원이다. 파격 세일 행사 때 가격이 적정선으로 보인다.”고 국내 브랜드에 불만을 토로했다.
심지어 “잘 나갈 때는 자국민을 호갱님(만만해서 속이기 쉬운 고객이라는 뜻의 신조어) 취급하면서 거품 가격으로 팔고, 지금처럼 힘들어질 때만 국내 패션 기업 위기라고 국민이 도와야 한다는 분위기도 수긍할 수 없다.”, “브랜드 홈페이지 들어가면 전부 ‘트렌드’를 강조하는데 요즘 국내 브랜드에 트렌드가 있나. 다 베끼는 거지.”라는 강하게 반발심을 가진 의견도 있었다.
정말 한국 브랜드에는 더 이상 디자이너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자본과 마케팅으로 살아남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이미 국내 브랜드들이 많이 없어졌다. 카피와 비싼 가격, 이 모순적인 굴레로는 명품 브랜드가 차지한 고가 시장, SPA 브랜드가 장악한 저가 시장 어디에도 대한민국 브랜드가 설 자리는 없다.
서둘러 잘 나가는 SPA 브랜드 혹은 명품 브랜드와 비슷하게 콘셉트를 바꾸기 전에, 소비자들의 이런 부정적인 목소리에 응답해줄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정확한 타깃 설정,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화되는 브랜드 정체성, 합리적인 가격 등 진실성있는 기반 구축만이 ‘호갱님 취급’에 등을 돌린 소비자들을 다시 국내 브랜드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다.
[매경닷컴 MK패션 조혜원 기자 news@fashio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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