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의 혁신을 가져온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패션찬가 ①]
입력 2013. 07.09. 09:31:39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색(色)만 이야기하자면, 요즘처럼 우리 옷의 색깔이 다양해지고 개성이 뚜렷하고 화려하고 요란스러웠던 때가 있었을까 싶다. 색깔의 다양함은 어떤 표현도 가능하다는 우리말로 설명이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한때 우리에게 옷은 ‘벌거벗은 몸을 감추는 기능’만을 지녔던 때가 있었다. 옷의 형태나 질감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옷의 색깔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불렸다. 흰옷을 즐겨 입고 흰색을 숭상하는 오랜 전통에서 유래하여 한민족(韓民族)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단일민족으로서 오래도록 정체성을 지켜온 우리 민족에 대한 지칭이다.
흰색은 순결하고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래서 우리는 백의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중국의 ‘삼국지’를 보면 고대 한민족 국가인 부여에 대해 “부여사람들은 저고리와 바지, 그리고 두루마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복을 흰색으로 만들어 입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사시사철 흰옷을 입었으며, 일할 때나, 평상시, 외출할 때 모두 통일하여 흰옷을 입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흰옷은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직업의 차별을 초월하여 한 민족,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정신적 연대가 백의민족의 풍모로 관습화된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흰옷의 의미는 더욱 강렬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관직이 떨어진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白衣從軍)했고, 벼슬 없이 뒤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은퇴한 관료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해 거족적으로 일으킨 ‘3·1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마침 고종의 인산 날이 겹쳐서, 전국은 온통 백의의 물결로 뒤덮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 된 민족의 혼을 백의로서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흰옷의 착용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금지령은 우리 국민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흰옷은 권력자에 대한 저항과 부유한 자에 대한 정의를 판별하는, 대중의 잠재된 큰 힘을 상징한다.
통일된 색(色)은 이처럼 ‘하나됨’을 강하게 암시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전국을 물들였던 ‘빨간색’도 ‘하나됨’의 좋은 예다. ‘붉은 악마’의 유니폼이 알게 모르게 전국으로 번져 남녀노소 누구나 빨강 티셔츠를 하나씩 장만했다. 전국의 의류공장이 밤샘작업으로 티셔츠를 만들었을 정도다. 뒷날 우리와 16강전에서 맞붙어 패한 이탈리아 팀의 한 관계자는 “선수는 물론 관람석의 응원단까지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었는데, 심리적으로 두려움이 앞섰다”라고 술회하면서 “이후 몇 년 동안 빨간색 트라우마에 고생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백의민족이 적의(赤衣)민족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면, 한때 황의(黃衣)민족으로 색깔혁명을 일으킨 때도 있었다. 노란색 신드롬이었다. 근래 들어 노란색이 대중의 관심 색깔로 등장한 때는 두 번. 하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불러온 ‘노란색 물결’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중가요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몰고 온 것이다.
“대중가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다면, 이 노래가 나온 시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61년 여름. 전국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여졌다. 반팔의 노란색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거리에 넘쳤다. 옷가게마다 너도나도 노란색 셔츠를 앞자리에 내걸었고, 원단업체와 염색공장들은 노란색 주문으로 철야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섬유패션업계가 ‘노란셔츠 신드롬’ 수준으로 몸살을 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허스키 보이스’ 가수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이 해에 발표돼 크게 히트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결과이다.
<노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이 쏠려 / 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 본 심정 / 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 / 노오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한명숙은 이 노래를 당시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굵고 거칠며 탁한 목소리로 불러 갈채를 받았다. 이 노래는 1940~60년대 한국 대중가요계를 대표하는 작곡가 손석우의 작품이다. 그는 1920년 서울 태생으로, 일제 말기 오케레코드에서 기타 연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 직후 KPK악단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환도한 이후 KBS 전속 악단에서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요 창작을 시작했다.
손석우는 1960년대 들어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비롯한 많은 히트곡을 내며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남인수의 ‘청춘고백’,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 송민도와 안다성이 듀엣으로 부른 ‘청실홍실’,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손시향의 ‘검은 장갑’ 등이 그의 작품이다. 1963년과 1965년에 방송 음악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고, 196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체류하다가 귀국했다.
이 노래 가사에 나오는 샤쓰는 어째서 ‘노란 샤쓰’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손석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특히 노란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노래의 악상이 떠올랐을 때 자연히 ‘노란 샤쓰’란 말이 나왔다. 이 멜로디에는 ‘빨간 샤쓰’도 ‘파란 샤쓰’도 어감이 안 맞으며, ‘노란 샤쓰’, 그것도 ‘노오란’이라 해야만이 부드러운 맛이 난다” (‘한국가요 이모저모 : 한국 대중가요 60년사’에서)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인기는 해외에도 파급되어 동남아 일대를 휩쓸었으며, 멀리 유럽으로까지 퍼져갔다. 1965년 프랑스의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가 내한했을 때 이 노래를 한국어로 불렀고, 그의 요청으로 레코딩도 했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 사이에서 많이 애창되었고, 1970년에 하마무라 미치코가 일본어로 불러 히트했다.
한명숙은 1935년 평안남도 진남포 태생으로, 1951년 미8군 연예단에 가입했다. 이 무렵 그와 더불어 현미,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이금희, 김상국, 서수남, 신중현 등이 미8군 쇼무대에서 활약했다. 한명숙은 반도, 태평양 등 공연 단체 무대에서 팝송을 불렀으며, 여성 보컬 현시스터즈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0년 손석우에게 발탁되어 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그의 데뷔 음반이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발매 후 6개월 동안 별 반응이 없더니, 1961년 초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 널리 불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1962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한명숙이 신영균과 더불어 주연을 맡았다.
이 노래가 등장한 1961년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해이다. 6.25전쟁이 휴전된 지 고작 8년이 지난 때라 서울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이 여전했다. 박남수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이 지옥 같았다”던 시대다.
‘목구멍 풀칠하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입는 옷에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헐벗다’는 표현이 꼭 맞는 시기. ‘백의민족’의 기개를 지키기에는 버겁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흰옷은 입으면 쉽게 더러워지고 자주 빨아 입다보니 또한 쉽게 삭아버리는 단점이 있다. 여기저기 꿰매고 덧대도 깨끗이 빨아 입는 것이 예의였던 때였는데, 노래 한곡으로 전국에 ‘노란샤쓰’가 넘쳐났으니, 이 노래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news@fashionmk.co.kr / 사진=‘노란샤쓰의 사나이’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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