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자유 그리고 이상, 변진섭의 ‘희망사항’ [패션찬가 ②]
입력 2013. 07.15. 16:46:43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가요에는 시대와 함께 사회나 풍속과 더불어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지역과 세대, 성별과 직업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마음속 깊이 호소하는 힘이 있다.
변집섭이 1989년에 발표한 ‘희망사항’도 사회와 인간의 변모를 유쾌하게 노래한다. 80년대 후반 남성들이 어떤 여성상을 그렸는지에 대해 재밌는 가사와 멜로디로 풀이한 노래다.
‘희망사항’은 변진섭의 정규 2집 ‘너에게로 또다시’ 앨범 마지막 트랙인 11번째에 수록된 곡이다. 당시 이화여대 음대 작곡학과 학생이었던 노영심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발표 당시에는 앨범 관계자 모두가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노래이다.
변진섭의 고백에 따르면 “방송에서는 부르지 않고 콘서트에서 보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아 부록처럼 끼워 넣었던 노래”다. 그런데 막상 공개가 되자 호평이 이어지면서 타이틀곡 ‘너에게로 또 다시’와 함께 1위 다툼을 벌인 뒤 지상파 방송에서 16주간 줄곧 1위를 차지한 희대의 히트곡이 되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로 시작되는 이 노래에는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 멋 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 /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등 이상형 여성이 남성의 ‘희망사항’으로 등장한다. 특히 여성의 패션과 뷰티와 관련한 ‘바람직한 의상과 용모’가 언급돼, 관심을 끌었다.
가사에서 보면 이상형 여성 중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첫손 꼽힌다. 많은 이상형 가운데 왜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1순위에 올랐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멋진 여성은 몸매가 예쁜 여성이기 때문이다. 허리와 골반, 엉덩이, 허벅지, 긴 다리가 적절한 비율로 구성된 여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디자이너들은 “사실 잘록한 허리를 지나 둥근 엉덩이를 거쳐 곧게 뻗은 긴 다리로 이어지면서 인체의 곡선을 강조하는 청바지의 맵시는 다른 어떤 패션 아이템보다 섹시하다.”라고 말한다.
변진섭의 ‘희망사항’처럼 실제로 이 노래 이후 우리나라 청바지 시장에는 변화가 있었을까. 노영심이나 변진섭의 진술 같이 이 노래는 계산된 작품은 아니다. 그냥 노랫말이 재미있어 앨범 끄트머리에 매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시기 청바지 시장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희망사항’이 의도한 일은 아닌데, 결과적으론 그 변화의 한 축이 되었다.
1990년대 우리나라 청바지 시장은 일대 변화를 겪게 된다. 개성을 추구하는 X세대의 등장과 그들을 노리는 마케팅 전략으로 청바지는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본격적인 청바지 브랜드의 등장과 외제 청바지의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청소년들은 이름값 하는 청바지를 입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청바지를 안 입으면 왕따 당하는 묘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단순한 모양의 청바지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배꼽이 훤히 보이도록 지퍼를 짧게 달거나 다리가 길어 보이라고 아랫단 옆선을 터놓거나, 물들인 청바지를 모래로 탈색시켜 만든 ‘스노우 진’(Snow Jean)'이 등장했다. 멀쩡한 무릎 부분을 찢어 입는 것이 유행하고 미국에서 입다 버린 청바지를 구제품이라고 부르며 비싼 값에 구입하는, 당시로서는 황당한 일들도 일어났다.
1993년을 즈음해 나온 할리우드의 영화에서 마약과 술에 절어서 사는 불량소녀와 반항아,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일탈자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청바지나 청재킷이었다. 드류 배리모어 주연의 ‘건크레이지’, 파트리샤 아케트 주연의 ‘트루 로맨스’, 줄리엣 루이스 주연의 ‘칼리포니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 무렵 한국영화 ‘비트’에서 주연배우 정우성도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으로 스크린을 장식했다.
이들의 패션은 찢어진 청바지, 가죽 재킷, 반쯤 벗겨진 빨간 매니큐어, 어깨를 드러낸 옷, 주먹만한 플라스틱 귀고리, 그물 스타킹 등이다. 전 세계 패션업계는 이런 경향에 재빨리 편승, 이들의 차림새를 패션 특선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소비자의 취향이 다양해지고 고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유명 디자이너의 라벨을 붙인 새로운 진이 등장했다.
‘희망사항’에 버금가는 90년대 청바지 예찬 노래에는 박상민의 대표작 ‘청바지아가씨’가 있다. 1995년 발매한 박상민의 3집 ‘리턴 투 셀프’에 리메이크해 수록했던 곡이다. 원래는 김준 작사, 김명곤 작곡으로 1979년 록그룹 ‘사랑과 평화’가 부른 노래였는데 16년이 지나 박상민이 부르면서 히트곡이 되었다.
<청바지의 어여쁜 아가씨가 날 보고 윙크하네 / 처음 보는 날 보고 윙크하네 / 이거 참 야단났네 / 어 허~ 이거 참 라랄랄라 / 어 허~ 이거 참 라랄랄라>
박상민 특유의 창법이 매력적으로 묻어나는 노래로, 청바지를 입은 예쁜 아가씨를 보며 설레는 남자의 마음을 표현했다. 박상민의 ‘청바지아가씨’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지난 2010년 결혼 당시 청첩장에 “상민이가 ‘청바지 아가씨’를 만나 하나의 사랑으로 해바라기처럼 한곳만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습니다.”라고 썼을 만큼 ‘청바지아가씨’에 대한 각별함을 보였다.
누구나 옷장 속에 한두 벌 갖고 있는 옷, 청바지.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가장 많이 입는 옷이다. 종류나 형태도 엄청나게 다양해져서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입는 옷이다.
청바지가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청바지는 젊음과 자유, 저항 그리고 섹스의 이미지를 내포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게다가 구겨지든, 찢어지든 어떻게 입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실용성의 장점도 있다. 청바지는 패션의 특별함 혹은 이상(理想)과 이상(異常)함이 버무려진 옷이다.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news@fashionmk.co.kr / 사진=티브이데일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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