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군파일럿을 1등 신랑감으로 만든 쟈니브라더스의 ‘빨간 마후라’ [패션찬가⑤]
- 입력 2013. 09.05. 15:05:59
-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마후라’는 목도리를 뜻하는 영어 머플러(Muffler)를 잘못 발음하면서 생긴 말이다. 추위를 막거나 멋을 내기 위해 목에 두르는 물건을 이르는 목도리란 말은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도나도 목도리를 ‘마후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64년에 개봉된 영화 ‘빨간마후라’(감독 신상옥)의 흥행 성공이 가져온 결과이다. 영화의 성공과 함께 주제곡의 영향도 컸다. 주제곡은 당대 최고의 방송작가 한운사(2009년 작고)가 노랫말을 짓고, 한국 최초의 가요평론가로 기록되는 황문평(2004년 작고)이 작곡했다.<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 아가씨야 내 마음 잊지 말아라 /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 / 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 / 그까짓 부귀영화 무엇에 쓰랴 / 사나이 일생을 하늘에 건다>
가요 ‘빨간 마후라’다. 얼핏 짧고 단순한 노래 같지만 대한민국 공군 출신들에게는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추억의 되새김질을 하게 하는 노래다. 또한 6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는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이기도 하다.
영화 ‘빨간 마후라’는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장면과 시원한 활주로, 빨간 머플러가 컬러 필름으로 표현돼 관객을 압도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었는데 서울 명보극장에서만 25만 명을 동원했다. 이 영화는 여러 나라에 수출됐으며 주연으로 나온 신영균(86)은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사실을 들어 영화계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 스타는 신영균이다”라고 말한다.
영화와 더불어 주제가도 동남아 및 일본에까지 소개된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로 높이 평가되었다. 노래는 쟈니브라더스가 불렀다. 쟈니브라더스는 봉봉사중창단과 함께 1960년대 대중가요계에 남성 중창단 붐을 일으킨 남성4중창단이다. 리드 김현진(76), 테너 양영일(73), 바리톤 김준(72), 베이스 진성만(72) 등 네 명으로 구성된 쟈니브라더스는 4성 화음뿐만 아니라 율동 등으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주목받았다.
1962년 MBC 주최 ‘콩쿠르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가요계에 나온 이들은 ‘방앗간 집 둘째 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 등과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마포 사는 황 부자’와 ‘빨간 마후라’ 등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얻었다. 쟈니브라더스는 인기 최정상이던 1968년 TBC ‘쇼쇼쇼’에서 고별 공연을 갖고 해체했다.
멤버 중 김준은 그룹 해체 후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 현재까지도 매년 음반을 발표해왔다. 84년 TBC 주최 세계가요제 금상 수상곡인 박경희의 ‘나 이제 여기에’를 비롯하여, ‘사랑하니까’(패티김), ‘내 마음은 풍선(장미화)’ 등이 그의 곡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김준재즈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지난 해 12월, 자신의 삶과 음악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김준 재즈이야기‘를 출간했다.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김현진은 본인이 이끄는 ‘울바우 남성합창단’과 더불어 매년 정기공연을 해오고 있으며, 양영일은 음악교사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했다. 진성만은 영화배우 김지미의 여동생 김지애씨와 결혼, 영화사 지미필름 대표를 거쳐 현재는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쟈니브라더스의 대표곡 ‘빨간마후라’는 이들의 음악적 실력이 잘 담긴 노래이다. 63년 초여름, 이 영화 제작사인 신필름은 황문평에게 주제가 작곡을 의뢰해온다. 그런데 영화사는 상식을 벗어난 파격적 주문을 해온다. 주제가를 파일럿들이 첫 출격할 때 불러야하는데 하필 오늘 강릉기지를 빌려 촬영하는 날짜라 오늘 중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반나절 만에 작품을 완성해달라니 황문평은 난감했다.
가사를 받아 쥔 황문평은 노래 구상은 물론 동시에 노래를 불러줄 가수부터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급한 대로 당시 동아방송 강수향 음악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방송국에 쟈니브라더스가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황문평은 곧바로 악상의 뼈대를 잡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멜로디를 다듬었다. 주제가를 의뢰받은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작곡을 했고 두서너 번의 연습 끝에 쟈니브라더스에 의해 취입된 것이다. 쟈니브라더스 멤버 모두는 악보만으로도 곧 바로 노래가 가능한 실력파들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빨간마후라’였지만 이제는 대표적인 공군가로 자리했다. 또한 빨간마후라는 공군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 개봉 이후 이 노래는 국민가요로 불려졌다. 특히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각종 경기장의 응원가로 빠지지 않았다. 해외에서의 관심도 대단해, 대만의 경우 ‘빨간마후라’가 50년이 지난 현재까지 대만 공군가로 불리고 있으며, 대만 사람들은 이 노래를 자국의 군가로 알고 있을 정도이다.
영화와 주제가가 널리 퍼지자 공군 전투조종사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항공점퍼에 빨간마후라를 맨 조종사가 어쩌다 명동거리에 나타나면 그 인기가 요즘 아이돌스타 못지 않았다. 사인 공세가 이어지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여대생 사이에서는 신랑감 후보 1위에 올랐다.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보다 당시에는 공군사관학교 입학이 훨씬 어려웠다. 가짜 공군장교도 출몰했다. 그때의 신문 사회면에는 가짜 ‘빨간마후라’가 결혼을 빙자해 순진한 여성들을 울린 기사가 여럿 보인다.
빨간마후라는 특히 남성 패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에게 빨간마후라는 필수품이 되었다. 또 이제까지 ‘목도리’라 불리며, 방한용으로만 쓰이던 것이 멋 내기 소품으로 변화하면서 ‘마후라’ 선풍을 몰고 왔다.
‘빨간 마후라’는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에 위치한 고 유치곤 공군 준장의 호국기념관에 노래비로 세워져 이곳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노래비가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영화 ‘빨간마후라’가 모델로 삼은 실제 ‘빨간마후라’가 유치곤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공군에 따르면 유치곤 장군은 6.25전쟁 중 한국 공군 유일의 200회 출격 기록을 수립한 전설적 전투조종사이다. 1951년 소위로 임관한 유 장군은 1952년 1월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서 450m 초저공비행을 펼치며, 앞서 유엔군이 500여 차례 공격으로도 파괴하지 못한 철교를 폭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폭파 장면이 이를 묘사한 것이다. 유치곤 준장은 종전 후 공군 제107기지 단장으로 재직하다 영화 개봉 다음 해 38세 젊은 나이에 과로로 순직했다.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이 유치곤 장군이라는 사실은 한운사 작가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는 ‘번개처럼 지나간 청춘을 추도하며’ 라는 생전의 한 인터뷰 메모에서 “실제 주인공은 유 장군이 맞다. 당시 그를 직접 만나 수차례 인터뷰를 통해 스토리를 구성했다”라고 증언했다.
공군의 전투조종사가 빨간마후라를 착용하게 된 기원은 6.25 전쟁 당시 강릉기지의 제10전투비행단에서 비롯됐다. 공군에 따르면 빨간마후라를 처음 맨 파일럿은 공군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고 김영환 준장(1954년 작고)이다. 그는 1951년 11월 강릉 기지사령관 시절, 출장길에 친형인 초대 공군 참모총장 김정렬 소장(당시) 집에 들렀다가 형수가 입고 있던 자주색 치마를 보고 그 옷감으로 마후라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 장군의 마후라가 멋있게 보여 강릉 기지 조종사들이 모두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출격했다. 빨간색은 정열을 상징하며 불타는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키는 전투조종사의 단심(丹心)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또 우리 풍속에 귀신이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가 있어 한국 전쟁 중 매일 생사를 넘나드는 출격, 전투에 나가는 전국의 조종사에게로 퍼지게 됐다.
이후 빨간마후라는 전투조종사로서의 긍지와 명예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전통이 되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조종사들이 1년 8개월간의 모든 비행 교육훈련을 마치는 날(고등비행교육 수료식), 공군 참모총장은 모든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일일이 이 빨간마후라를 직접 매어준다.
[매경닷컴 MK패션 윤상길 편집위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빨간마후라’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