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파괴범으로 전락한 패셔니스타 “버리느냐 마느냐?”
입력 2013. 12.27. 17:02:49

[매경닷컴 MK패션 한숙인의 패션담론] 패셔니스타 상당수가 사들이는 데 충실할 뿐 잉여가 된 옷들을 버릴지 말지는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이런 고민들이 어제오늘일은 아니지만, SPA가 저가 옷을 무수히 쏟아내면서 ‘버릴지, 말지’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정리정돈녀들은 매년 주기적으로 친구나 지인을 모아놓고 옷을 처분하거나 인터넷이나 벼룩시장을 통해 옷을 판매해 꽤 짭짤한 수익을 거두기도 한다. 한편, 저장녀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옷을 묵혀뒀다가 유행이 다시 돌아오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잉여가 된 옷들을 되살린다.
‘지속가능한 패션’이 화두로 부상하면서 '한번 입고 버리는' 인스턴트 패션에 충실한 SPA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옷을 버리는데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는 힘들다. 역시나 옷 무덤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을 강박증 환자로 비난할 수도 없다.

“버려야지, 과감하게!”
30대 초반의 한 여성은 미국 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는 SPA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국에서는 SPA를 경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살면서 갑작스럽게 파티에 참석해야 할 때 SPA의 유용성을 체감했다고 말한다. H&M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1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완벽한 착장이 가능할 뿐 아니라 파티 참석까지 불과 30분도 안 돼 모든 준비가 끝나 실용적이라는 예찬론을 폈다. 물론 입은 옷은 파티가 끝남과 동시에 대부분 폐기처분이 되지만 전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버려야 새로운 옷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생명력이 다한 옷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마음이 떠난 남자와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SPA는 쇼퍼홀릭에게 최적의 솔루션이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왜 버려? 다 재산인데”
또 다른 30대 중반 여성은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옷을 저장해놓는다. 20살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입었던 야구점퍼를 다시 꺼내 입었지만, 그에게 촌스럽다고 하는 이들은 없다.
그는 “유행은 돌고 돈다. 4~5쯤 된 옷은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10년쯤 된 옷은 ‘핫’하게 입을 수 있다. 그게 패션이다”라며 자신의 신조를 피력했다.
40대 패션 디렉터는 “드레스룸 가득 옷이 쌓여있다. 직업 때문인지 옷이 가족이나 재산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누구를 준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옷마다 구매했던 이유와 사연이 다 있어 다른 사람 손에 그 옷이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고백했다.

패션의 기원과 맞물린 ‘버림의 갈등’
라르스벤젠은 그의 저서 ‘패션:철학’에서 패션의 기원은 중세 말기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에서 시작됐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패션은 변화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변화가 더딘 이전 시대 의복에 패션이라는 관점을 적용시킬 수 없다는 해석이다.
변화는 ‘과거의 버림’과 ‘현재의 수용’을 주된 매력으로 한다. 이 저서는 리처드 스틸의 “이런 신사양반, 숙녀의 옷은 닳아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 순간, 이미 낡아 버리는 거랍니다”의 말을 인용해 버림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대체가 아닌 보충의 논리가 된 패션의 구도변화를 언급했다.
그는 “대체가 아닌 보충의 논리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대체하는 방식이 아닌,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면서 전개된다”라며 21세기 패션의 기막힌 반전을 역설하기도 했다.

21C 패셔니스타 판별법, ‘처리의 기술’
패션에서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가 새삼 화두로 부상하는 데는 버려지는 옷들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작용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이 화두로 부상하면서 옷으로 유발되는 공해의 심각성이 보고돼 패션니스타를 향한 비난의 수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닌 ‘어떻게 버리고, 어떻게 저장할 것이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패셔니스타라는 품위 유지를 위해 사는 것을 멈출 수 없다면, ‘어떻게 버릴지, 또는 어떤 저장 방식을 택할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이다.
[매경닷컴 MK패션 한숙인 기자 news@fashionmk.co.kr/ 사진=MK패션, photop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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