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사이즈 강요받는 ‘30만원 세대’ [패션업계 노동현실①]
- 입력 2014. 11.06. 10:00:19
- [시크뉴스 곽윤 인턴기자] 지난달 17일 2015 S/S 서울 패션 위크가 열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 가면과 선글라스를 든 한 무리의 청년들이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You are not free)’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정식 노조가 아닌 신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주축이 돼 만든 운동 단체인 이른바 ‘패션 노조’다. 이날 패션노조는 패션위크 행사장 앞에서 낮은 임금, 몸매 차별 등의 부당 대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이에 수많은 매체와 누리꾼들의 관심이 집중되며 6일 기준 3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패션 노조의 SNS에 ‘좋아요’ 추천을 눌렀다. 패션 업계 종사자들의 고발 메일도 줄을 이었다. 노조 측이 제보 받은 사례들을 SNS를 통해 소개하면서 패션 업계의 부당한 관행이 수면 위로 떠올라 논란이 되고 있다.
◆ 부당임금- ‘88만원 세대’도 아닌 ‘30만원 세대’
패션 노조가 고발한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임금 실태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등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노조 측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 브랜드의 견습 직원 월급은 10만원이며 인턴 직원의 월급 역시 30만 원에 불과했다. 이에 해당 브랜드 관계자는 통화를 통해 “그런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른 디자이너 브랜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조 쪽에서 파악한 사례에 따르면 A 디자이너 브랜드는 3개월 동안 인턴 직원에게 한 달 40만 원 정도의 월급을 지불했다. A 브랜드는 해당 직원의 정직원 전환 후 급여를 120만원으로 인상했다. 그러나 초과 근무가 비일비재해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임금인 5580원에 못 미치는 3000원 정도의 금액을 받는 셈이었다.
사실상 무급이나 다름없는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없었다. 인턴제도는 본래 목적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체계적인 직업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조 측에서 제공한 사례에 의하면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이 없는 상황에서 디자인과는 상관없는 이른바 ‘잡일’에 동원됐다고 주장했다.
한 업계 종사자는 메일을 통해 인터넷주문상품의 배송과 소비자 전화 상담 등 온갖 일을 도맡아 했다고 전했다. 또 의류 관렵 중소기업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던 제보자는 업무의 대부분은 직속상사의 업무뒤처리와 개인 신부름, 사무실 비품 관리 등이었다고 전했다.
◆ 몸매 차별- 55사이즈 아니면 불합격
더 심각한 문제는 신입 패션디자이너들이 노동 권익은 물론 인권까지 침해받는 상황에 노출돼있다는 점이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열악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인턴직에 쟁쟁한 지원자들이 몰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포트폴리오를 갖췄어도 실력보다는 이른바 55 사이즈의 날씬한 몸매가 아니면 취업조차 힘들다는 것이 업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다.
한 제보자는 패션 노조를 통해 “면접을 보러가면 포트폴리오 평가 대신 몸매 평가만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면접장에 들어가자마자 몸매만 훑어보고 돌려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제보자는 “면접에 합격했지만 어깨가 옷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퇴사 통보를 받았다”라며 “구직을 위해 체형 교정 수술까지 고민 중”이라고 토로했다.
이에 패션 노조 관계자는 “월 300만원 정도의 피팅 모델 유지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를 막내 디자이너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 전환 없는 비정규직 생활,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살인적인 업무 강도에도 신입 디자이너들이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은 정직원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패션 업계에서는 이마저도 어렵다는 것이 제보자들의 주장이다.
한 패션 노조 관계자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로 정직원 전환을 꿈꾸며 대기업에서 4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했지만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은 인턴 직원의 이야기를 꼽았다. 이에 해당 기업 관계자는 “현재 하계와 동계로 나뉘어 정기 인턴을 모집하고 있으며 인턴 기간이 종료되면 임원 면접을 통해 합격자를 가린다”라며 “정직원 전환을 미끼로 한 이른바 ‘인턴 돌려막기’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한 제보자는 시크뉴스에 “공식 채용절차를 밟고 들어온 경우에는 문제가 없지만 아르바이트 형태로 비공식적 인턴을 채용하는 경우가 있다”라며 “이 경우에는 정직원 전환 보장 없이 인턴에 준하는 업무를 처리한다”라고 말했다.
인턴들과 신입 디자이너들은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법적인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업계 종사자는 패션 노조를 통해 “인턴은 물론이거니와 정직원들과 팀장급 직원도 근로 계약서를 쓰지 않아 서류상 직원은 한 명에 불과하다”라고 전했다. 근로계약서가 없기 때문에 퇴사를 해도 퇴직금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갑작스럽게 퇴사 통보를 받았을 때 노동청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일했던 제보자는 메일을 통해 “6개월 넘게 낮은 임금을 받고 일했지만 경력 증명서조차 발급받을 수 없었다”라며 개탄했다.
패션 노조는 지난달 30일 SNS를 통해 이른바 ‘전쟁선언문’을 공개했다. 노조 측은 "근로계약서 미작성, 부당임금, 몸매 차별, 수당 미지급이라는 4대악을 철폐할 것을 요구한다"라고 밝혔다. 한 노조 관계자는 "앞으로도 사례를 수집해 노동부와 여성부 등을 통해 진정을 넣을 계획"이라며 “최종 목표는 대규모 고소와 고발을 통해 업계 종사자들을 위한 안정장치 확립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또 그는 “이를 위해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라고 덧붙였다. 노조 측은 연이은 고발에 회의론자들도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쟁선언문은 올린 지 7일 만에 200여명이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패션 업계의 열악한 대우에 대한 반발은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지난 해 2월 미국 뉴욕에서는 인턴들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다. 영국의 대학생들도 런던 패션위크에서 피켓을 들고 인턴에게 급여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올 2월에는 영국 킹스 칼리지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패션위크 행사장 앞에 ‘유급인턴이 이번 시즌 트렌드다(Paying interns is so in this year)’라는 배너를 내걸기도 했다. 패션업계는 늘 해외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하지만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권침해에 대해서 개선 움직임이 보일 지는 미지수다. 이에 패션 업계가 새로운 ‘트렌드’를 받아들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곽윤 인턴기자 news@fashionmk.co.kr/ 사진=패션노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