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황석정과 ‘와라나고 보기 운동’
입력 2015. 03.09. 10:54:28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요즘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장면을 훔치는 사람’ 안에 든 진짜 의미는 영화 드라마 등에서 훌륭한 연기력이나 독특한 개성으로 주연 못지않게 주목을 받으며 작품의 중심 역할을 맡은 조연이다.

지난 8일 종영된 MBC ‘전설의 마녀’에 원래 카메오 출연으로 끝날 뻔했으나 워낙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결론적으로는 주연배우인 한지혜 등의 존재감이 미미했기에-고정으로 바뀌어 끝날 때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약한 영숙 이모 역의 김수미가 대표적이다.

지난 7일 방송된 MBC ‘세상을 바꾸는 퀴즈’(이하 ‘세바퀴’)에 출연한 황석정이 이튿날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권에 올라 온종일 화제가 됐다. 사실 그녀는 신 스틸러라고 하기에 낯 뜨거울 만큼 큰 비중의 배역을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깜짝출연만으로도 시청자(관객)들로 하여금 ‘저 여자 누구지?’라는 궁금증을 품게끔 만들었다. 그 정도로 개성있는 얼굴과 흠잡을 데 없는 연기력이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지난해 2~8월 방송된 KBS2 주말드라마 ‘참 좋은 시절’은 이뤄지기 힘들었던 강동석(이서진)과 차해원(김희선)의 사랑얘기와 더불어 그들의 집안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도가 기둥줄거리를 이뤘다. 그런데 동석의 집안일이라면 매번 귀를 쫑긋 세우고 나서 사사건건 참견함으로써 그 가족들의 애간장을 타게 만드는 ‘깐족’ 캐릭터의 동네 아줌마 재숙은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황석정의 존재감이 안방극장에서 본격적으로 빛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미니시리즈 ‘연애의 발견’에서 주인공들의 단골 주점 주인 역을 맡아 “사랑이 뭐라고, 밥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이야”라고 ‘개똥철학’을 설파하며 역시 신 스틸러로서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와 동시에 MBC ‘야경꾼 일지’에서 앞날을 보는 재주를 가진 백두산 마고족의 당골어미 역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연말 시청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케이블TV tvN ‘미생’에서 하회탈 재무부장 역으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세바퀴’ 출연으로 그녀가 누리꾼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증거다.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권유로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고, 이후 첼로를 무릎 사이에 끼우기도 했던 그녀는 고교 때 국악 연주단의 공연을 우연히 본 후 다시 피리를 입에 물고 서울대학교 국악과 89학번으로 입학한다.

이후 다시 극단으로 갈아탄 그녀는 드디어 2001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통장아줌마와 거지여인의 1인2역을 맡아 영화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연출제작과 출신 여자 감독 정재은의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스무 살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여자들의 사랑과 희망을 고양이에 빗대 실감나게 다뤄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배두나와 이요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저예산영화라는 한계 때문에 흥행에는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등의 저예산이지만 작품성과 메시지가 강한 작품들이 줄줄이 흥행에 참패하는 바람에 영화계와 관객 사이에서는 ‘와라나고 보기 운동’(각 영화의 제목 앞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 일며 각 작품들이 재조명된 바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여자감독 임순례의 숨은 걸작 중의 하나로 희망과 행복을 질문하며 삶이 뭐냐는 고찰을 숙제로 내던진다. 제목의 ‘와이키키’가 하와이가 아니라 수안보의 와이키키 호텔이라는 현실과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풀샷의 카메라, 그리고 밴드 멤버들의 소소한 일상은 참으로 웃픈 현실을 잘 그려냈다는 호평을 얻었다. 황정민 류승범의 초기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라이방’은 1994년 ’게임의 법칙‘으로 한국판 누아르를 개척한 장현수 감독의 작품으로 역시 암울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주연배우들의 열연으로 유명하다.

문승옥 감독의 ‘나비’는 왕자웨이 감독의 ‘동사서독’이 상처의 치유와 망각을 무협으로 풀었다면 SF란 장르로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력 때문’이라는 ‘동사서독’의 주제를 담은 대사와 일맥상통한다. 강혜정의 풋풋한 이미지와 이를 무색케 하는 연기력을 보는 재미도 있다.

당시 이렇게 ‘와라나고 보기 운동’이 인 것은 이 네 편의 저예산 영화들이 다수의 관객에겐 외면당했지만 영화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필독서’마냥 신격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는 상영관들은 좌석이 비자 줄줄이 영화를 내렸고 마니아들과 관계자들이 ‘와라나고 보기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상영관이 다시 스크린을 내주기도 했고 결국 이 네 편의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잊지 못할 목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신 스틸러’가 됐건 황석정이 됐건 이 ‘와라나고 보기 운동’은 저예산 영화 혹은 주연배우 만큼의 인기를 누리진 못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꼭 필요한 조단역에 대한 찬사 혹은 존경이다.

거대 배급사나 극장주의 횡포에 대한 저예산 영화 관계자 및 다양성을 요구하는 관객들의 불만과 반발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에도 그런 볼 권리에 대한 운동이 활발했고 올해에도 역시 그런 움직임은 충분히 예상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배급사와 극장주의 상업의 논리를 반대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다양한 콘텐츠를 근거로 한 문화의 발전과 소수의 만족도에 대한 배려 역시 자본의 논리에 희생돼선 안 된다. 유로화로 결속을 다지며 로마제국의 신화를 되살리려 하는 유럽이나 거대한 땅덩어리만큼이나 많은 인구와 자본으로 제국주의의 야망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 미국이 현대사회의 어쩔 수 없는 ‘총성 없는 전쟁’의 대표라면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의 소수민족의 전통도 인정받고 승계돼야 마땅하다.

만약 ‘명량’이나 ‘겨울왕국’이나 ‘트랜스포머’같은 영화만 존재한다면 ‘이블 데드’의 샘 레이미,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 ‘고무인간의 최후’의 피터 잭슨처럼 저예산 독립영화를 기반으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우뚝 선 크리에이터들을 배출해내지 못할 것이다.

‘집으로’ ‘죽어도 좋아’ ‘워낭소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등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흥행만큼은 아니더라도 소수의 취향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문화적 아량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문화의 전체적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M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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