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 임권택의 일탈과 안성기의 연기가 여배우 전신노출을 누르다 [시네프리뷰]
- 입력 2015. 03.18. 09:54:34
-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한국의 영화인들은 임권택 감독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존경심을 보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대선배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부친의 이데올로기 탓에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고, 먹고 살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들어 ‘먹고 살기 위한’ 영화를 찍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영화다운 영화’를 찍더니, 갑자기 ‘장군의 아들’ 같은 드러내놓은 상업영화도 찍다가, 작정하고 ‘서편제’나 ‘취화선’도 찍은 그의 굴곡진 영화인생에 대한 찬가를 꼭 불러주고 싶은 애잔함 때문이다.
‘하류인생’이나 ‘창’ 같은 영화도 찍었고, 그저 막연한 애국심이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민족정서 고취의 프로파간다에 힘입어 단관 개봉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도 찍었던 이 백전노장이 102번째 영화에서 드디어 자신의 모든 이데올로기와 영화적 정서와 진지한 삶의 고찰을 화면은 잔잔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에너지는 매우 강한 화법으로 웅변한다.
평소 그는 어눌한 말투로 유명하지만 이 영화의 언어만큼은 무척 또박또박하고 힘에 넘친다. 내달 9일 개봉되는 ‘화장’(명필름 제작)이다.
김훈의 원작소설을 읽었건 그렇지 않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설명을 들었건 못 들었건 ‘화장’이 ‘화장품을 바르거나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밈’ ‘머리나 옷의 매무새를 매만져 맵시를 냄’이란 메이크업 단장 치장의 화장(化粧)과 시체를 불 태워 장사지내는 화장(火葬)의 중의적 표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어제목이 자동사로는 ‘다시 살아나다’ ‘다시 체험하다’, 타동사로는 ‘회상하다’ ‘추억하다’는 뜻의 ‘Revivre’다. 주인공이 오 상무(안성기)고 그 다음 주인공이 그의 아내(김호정)라면 추은주(김규리)는 세 번째 주인공이다. 그런데 영어제목을 보면 추은주가 주인공이다.
김훈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삶과 죽음, 이성과 관능, 욕망과 체면, 고마움과 수치 등의 복잡다단한 인간의 심리를 바늘로 콕콕 쑤시면서도 이데올로기는 김훈보다 더 내밀하고 은밀하며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만약 ‘장군의 아들’이나 ‘하류인생’의 자본과 타협하는 상업감독 임권택이나, ‘서편제’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만 고집하는 민족감독 임권택을 예상했다면 이 영화는 뜬금없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감각의 제국’의 일본 감독 오시마 나기사나 ‘희생’의 구소련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같은 작가가 한국에서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싶다면 ‘화장’은 최소한 근 20년 사이 최고의 걸작이다.
사실 영화는 쉽지 않다. 영화언어에 대한 상식을 떠나 최소한 40대는 돼야 이 영화가 이해된다. 그렇다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나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나서도 꽤 오랫동안 불편하고 찜찜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스타일일까? 천만의 말씀. 주연 여배우인 김호정과 김규리의 체모가 드러날 정도의 전라 장면을 굳이 강조하는 게 낯 뜨거울 정도로 영화의 감정선은 잠시도 눈을 못 떼게 만든다. 게다가 안성기와 김호정의 연기력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 아니 매우 자랑스러워 이런 감독과 배우들이 작업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가슴 벅찰 정도다.
국내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화장품 회사에서 오너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오 상무는 아내의 도움으로 대학원까지 나온 덕에 오늘날 10억 원짜리 번듯한 집에 살며 시골에 별장까지 보유한 성공의 주인공인데 어느날 아내가 암으로 입원해 죽을 날짜를 세는 불운에 부닥친다. 자신 역시 전립선 비대증으로 종아리에 소변통을 차고 다닐 정도로 늙었다.
그런데 평온하고 점잖던 그의 삶에 어느날 일탈이 찾아온다. 홍보팀장으로 영입된 추은주(김규리)의 매력에 푹 빠져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몽환적인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현실은 퇴근 후 아내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지만 사무실은 가상의 공간이 돼 추은주의 옆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욕망의 기포를 마음껏 기화시킨다.
그런 오 상무의 심적인 용틀임을 추은주는 어느 정도 눈치 챈다. 하지만 그녀는 오 상무에게 청첩장을 들이밀고 며칠 뒤 그녀는 결혼이 깨진 뒤 경쟁사의 중국 지사 입사시험에 합격하고는 오 상무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사랑 혹은 욕망의 배출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죽는다. 그리고 화장으로 처리하자 처제는 ‘꽃상여로 화려하게 보내야 마땅한데 화장이 뭐냐’며 오 상무에게 울부짖고, 딸은 ‘엄마를 사랑은 했냐’고 역시 오 상무의 지나온 삶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렇게 아내를 떠나보낸 후 오 상무는 혼자 별장으로 온다. 그곳에서 아내가 죽기 전에 택배로 보낸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평소 소주만 즐기던 그였지만 추은주로부터 선물 받은 와인을 각별하게 마셨고, 아내는 그 와인 대여섯 병을 죽기 전에 남편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유품들을 태우는 과정에서 낡은 아내의 지갑을 발견하곤 그 속을 들여다본다. 텅 빈 지갑에서 나온 유일한 것은 바로 젊은 시절 그의 사진이었다.
그 전까지 그의 내면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아내와 마지막으로 별장에 와 비아그라를 먹은 뒤 마지막이 될 아내와의 성관계를 할 땐 시작은 아내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지만 마무리는 추은주에 대한 비겁한 욕망이었다.
그렇듯 그는 아내가 죽기 전 정과 사랑, 이성과 욕망, 체면과 일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방황하고 번뇌했다.
하지만 아내의 지갑에서 발견된 그 사진을 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노선을 찾았다. 그 사진은 잃어버렸던 자아였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자신의 본분이었고, 딸 같은 부하직원을 향해 품었던 추접한 욕망에 대한 자아비판이었다.
이 영화는 크게 4가지 장면에서 관객에게 숙제를 준다. 첫 번째 숙제는 인트로의 상여가 나가는 신이다. 오상무의 상상 신으로 상복은 노란 색이 아니라 검은 색이고, 그 속에 이물질처럼 끼어든 추은주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노톤으로 처리됐기에 추은주의 빨간색은 당연히 튄다. 이것은 관습과 욕망의 대비다.
두 번째는 오 상무와 아내의 베드신과 오 상무가 속옷을 입은 채로 배변한 아내를 좌변기에 앉혀 씻겨주는 장면이다. ‘감각의 제국’의 남자주인공 기치조는 무력하게 거리를 헤맬 때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 틈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패전한 일본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아내와 애정이나 성욕 없는 마지막 부부관계를 시도하고 행위 중 추은주를 그리는 오 상무는 이 사회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비슷한 위치의 남자들의 추레한 현실 혹은 더 나아가 천박한 자본주의만 앞세우는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아무 것도 부끄러울 게 없는 남편이지만 용변과 샤워조차 할 수 없이 무기력해진 자신의 몸 깊은 곳을 남편의 손길이 대신 씻겨줄 때 울부짖는 아내의 비참한 심리와 그런 아내를 끌어안고 달래주는 굽은 오 상무의 등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세 번째는 무턱대고 별장을 찾은 추은주를 기다리는 텅 빈 별장 거실에 차려진 와인과 두 개의 잔이다. 아내가 남긴 와인에 잔이 두 개다. 그런데 막상 오 상무는 그 자리를 일부러 피했다. 또한 정처 없이 시골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오 상무와 그런 그를 발견했음에도 그냥 차를 내달리는 추은주다.
단념과 포기, 가치관과 욕심, 의리와 보답 등 복잡한 인간의 수십 가지의 상념과 이념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회색의 오 상무의 중대형 승용차와 흰색과 빨간색의 투톤컬러인 추은주의 소형 승용차다. 오 상무는 이제 할아버지로 가는 길목의 중년남자이므로 당연히 회색이다. 추은주는 30대 초반 정도의 젊음과 미모가 절정인 흰색과 열정적인 빨간색이다.
그동안 임 감독은 한국적인 정서와 전통에 집착하되 인간의 본성을 파고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화법은 직설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회적인 간접화법으로 자본주의와 인간의 이기심을 강하지 않지만 꽤 무게감 있게 꾸짖는다. 이 80세의 노작가는 이제 ‘전설’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확실한 준비가 된 듯하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명필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