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파리, 텍사스’ ‘이터널 선샤인’ ‘엘리노어 릭비’
입력 2015. 03.18. 17:40:07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 '파리, 텍사스'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 지역 텍사스 주의 어느 황량한 마을에 탈진한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캘리포니아 주 LA에서 트래비스의 아들 헌터를 키우며 4년전 병원에서 말 없이 사라진 형 트래비스를 찾아온 월트가 한걸음에 달려와 그를 깨운다.

월트는 형이 텍사스에서 형수 제인(해리 딘 스탠튼)과 살다가 왜 갑자기 헤어지게 됐는지 털어놓지 않자 답답해하고, 트래비스는 제수로부터 제인이 헌터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휴스턴의 한 은행을 통해 송금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헌터와 함께 길을 떠나 결국 유사 성행위를 하며 살고 있는 제인을 찾아낸다.

제인이 일하는 곳은 남자 손님은 제인을 볼 수 있지만 제인은 손님을 볼 수 없는 유리벽이 가로막힌 곳.

결국 트래비스는 아들에게 엄마를 만나게 해준 뒤 또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 매 시퀀스마다 울려 퍼지던 라이 쿠더의 슬라이드바를 이용한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일렉트릭 기타 선율이 긴 여운과 아픔을 주며 미끄러진다.

독일 출신의 명장 빔 벤더스 감독이 걸작 ‘베를린 천사의 시’ 이전인 1984년 연출한 ‘파리, 텍사스’다. 황량한 사막 위의 텍사스에서 열정만은 잃지 않은 채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항상 꿈꿔온 유토피아는 화려하고 세련된 파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파리로 떠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현대인의 외로운 페이소스와 갈증을 가족의 상실과 관계복원이라는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메마른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노스탤지어에 대한 안타까운 고요한 외침이었다. 현대 문명이 현대인에게 ‘선물’한 존재의 소외와 인간미의 상실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화면 가득 묻어난다. 칸국제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 '이터널 선샤인'

화성에서 온 남자가 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금성이다. 화성에서 바라보니 금성은 아름다웠고 그곳에 사는 여자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남자는 모든 것이 신비로웠고 여자와의 시간은 꿈만 같았다.

여자 역시 남자를 처음 봤다. 오랜 시간 외롭고 울적했고 희망이 없던 여자는 남자의 세심한 배려와 믿음직한 행동, 그리고 그 체취가 좋았다. 둘은 뜨겁게 사랑했고 하루하루가 행복한 눈부심이었다.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이 이들의 삶을 비추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다른 점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두 번째 세 번째까지도 놀라지만 그게 끝이겠지 하고 애써 지우려한다. 그러더니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분비되는 테스토스테론에 강렬한 성적 매력을 느꼈었다. 남자는 그에게 없는 여자의 에스트로겐이 꿀맛 같았다. 그 두 가지가 반응해 도파민이 엄청나게 분비됐다.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도파민이 생산되지 않고 서로의 호르몬에 식상한다.

그들은 다른 별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같은 단어지만 그 뜻은 달랐다. 금성인이 직장에서 있었던 힘든 일을 얘기하는 것은 ‘내 말 끝까지 들어줘’라는 뜻인데 화성인은 ‘내가 가서 그를 혼내줄까, 아님 당신이 참고 일할래?’라고 반응한다.

프랑스가 낳은 천재적 감독 미셸 공드리의 2003년작 ‘이터널 선샤인’은 멜러 팬터지 SF 등의 장르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사랑의 속성을 날것 그대로 그려내는 가운데 만나면 헤어지고, 사랑하면 싫증나고, 없으면 허전하지만 있으면 귀찮은 인간의 속물적 양면성을 부둣가의 생선비린내처럼 표현한다.

평범한 회사원 조엘(짐 캐리)은 2004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아침에 눈을 뜬다. 직장 일에 치여 사는 그는 최근 전 애인과 헤어지고 허름한 단칸방에서 밸런타인데이를 맞았다.

출근행 대중교통을 기다리던 그는 갑자기 몬톡 행 열차를 탄다. 한겨울의 스산한 바닷가. 무작정 달려온 그곳에서 그는 오렌지색 후드티를 입고 머리는 파랗게 염색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릿)을 만난다. 그는 독백한다. ‘왜 나는 관심도 없이 쳐다보는 모든 여자들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라고.

그렇게 두 사람은 꿈같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로의 단점을 발견하고 실망하고 애정이 식으면서 클레멘타인은 부분적인 기억을 지우는 회사에 의뢰해 뇌에서 조엘과의 추억만 지운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몰라보는 클레멘타인에게 충격 받은 조엘은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역시 그 회사를 찾아가 그녀의 기억을 지운다.

트래비스와 제인,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추억이 아니라 고통이다.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

# '엘리노어 릭비'

코너 러들로(제임스 맥어보이)와 엘리노어 릭비(제시카 채스테인)는 뜨겁게 사랑한 부부였다. 그러나 릭비는 예고도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러들로의 곁을 떠난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라진 아내 때문에 일상이 무너져버린 러들로는 릭비를 찾아가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지만 릭비는 과거를 잊어야만 살 수 있기에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러들로는 다른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여전히 괴롭다. 아니, 더 괴롭다. 릭비 역시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아픈 추억이건, 슬픈 기억이건 지운다는 게 쉽지 않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스스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아 시술대에 누운 조엘이 ‘내 머리 속에 들어온 지우개’를 거부하는 본능에 지는 것은 인간 본연의 사랑에 대한 이기심이다.

내달 국내 개봉되는 네드 벤슨 감독이 비틀즈의 ‘엘리노어 릭비’에서 영감을 얻어 연출한 영화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다.

# 아픈 기억, 슬픈 추억

‘파리, 텍사스’의 트래비스는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런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에 의한 가족의 파괴에 대한 의식적인 자기방어 시스템의 구동이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사회와 단절시키고 에고 속으로 들어가 최소한의 숨을 쉴 수 있게끔 환경에 최적화된 것이다. 아니면 자살하니까.

제인은 일탈로 현실타파 혹은 현실도피를 꾀한다. 빈털터리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몸뚱이를 이용해 더러운 욕망에 눈이 뒤집힌 저급한 남자들의 성욕을 충족시켜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손님들 역시 잊고 싶은 기억 투성이인 또 다른 트래비스였다.

그래서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과학의 힘을 빌려 강제로 기억을 지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똑같이 반복된다. 결국 기억은 지울 수 없다. 자연스레 지워지는 것밖엔 없다.

그래서 러들로와 릭비는 그냥 괴로워한다. 그게 사랑이고 인생이니까.

이 세 영화는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닮았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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