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안성기는 왜 드라마를 거부할까?
- 입력 2015. 03.19. 10:23:04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지난 18일 방송된 종합편성채널 JTBC ‘뉴스룸’에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의 남자 주인공 안성기가 출연했다.
손석희는 안성기에게 “지금까지 60년 동안 오로지 영화에만 출연하고, 드라마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TV 드라마 관계자들에 한해서 서운한 일일 수 있다”며 “드라마는 앞으로도 안 할 것이냐? 이유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그는 “드라마가 일정은 영화에 비해 타이트하지만 요즘에는 영화 식으로 찍는다. 하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다. 그래서 그 환경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젊었을 때부터 드라마를 꺼린 이유를 밝히면서 “딱 한번 단막극에 범인으로 출연했다. 50분짜리 분량이었는데 연습 한 번 하고, 야외 녹화 한 번, 스튜디오 녹화 후 50분을 만들었다. 영화 촬영은 50분을 위해 두 달을 찍는데 드라마의 경우 일주일에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부연했다.
경동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조용필과 안성기는 각각 국민가수 국민배우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은, 자타공인의 대한민국 대표 가수와 영화배우다.
조용필은 1981년 영화 ‘내 사랑 한이 되어’에 출연한 것을 제외하곤 오로지 뮤지션의 외길만을 걸어왔다. 그는 한국인의 정서 상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 안성기가 주연을 맡은 영화 ‘라디오 스타’에 자신의 히트곡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를 사용토록 허락했을 뿐 자신의 음악은 오로지 자신만 연주해야 한다는 철칙을 고수해왔다.
아역배우로 60년 전 배우 일을 시작한 안성기 역시 ‘아무 것도 모를 때’ 딱 한 번 드라마에 출연한 뒤론 연기는 오로지 스크린을 고집했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그리고 방송가 사람들은 손석희처럼 안성기에게 묻는다, ‘왜 드라마에 안 나오냐’고.
각종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지구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 그리고 자연치유에 의해 유지되는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 생태계를 기능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무생물적 환경,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분해자의 네 가지 요소가 된다.
무생물적 환경은 햇빛, 온도, 습도, 물, 토양 등 생물의 자연환경을 이루는 물리 화학적 요소들로서 지역 생태계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한다.
생산자는 다른 모든 생물체에게 직간접적으로 먹이가 되는 유기물질을 1차적으로 생산하는, 광합성작용을 통해 영양분을 생산하는 녹색식물 등이고 소비자는 생산자 또는 다른 소비자(초식동물)를 먹이로 하는 생물체(육식동물)를 말한다.
분해자는 생산자나 소비자와 같은 유기물을 분해해 무기물로 만드는 균류와 박테리아 등을 말한다. 분해된 무기물은 무생물환경으로 돌아감으로써 생태계를 순환시킨다.
안성기는 이런 생태계의 질서를 지키고자 한다. 만약 하마가 육식으로 식성을 바꾸면 아프리카의 생태계는 파괴될 것이다. 육식하는 귀신고래나 범고래가 만약 진화해 육지로 올라온다고 가정해보자. 지구의 운명이 바뀔 것이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이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나 뭐가 다르냐’고 안성기의 ‘고집’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한국사람이 한우를 선호하는 차원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기자는 영화배우 탤런트 뮤지컬배우 연극배우 개그맨 등으로 분류된다. 그들이 서는 무대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컨텐츠는 분명히 다르다. 어차피 대중을 상대로 한 연예 혹은 예술 활동이지만 똑같은 소비자가 두 개 이상의 컨텐츠를 동시에 즐기더라도 그 과정과 목적과 소비방식은 다르다는 차원의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에도 호주에도 뉴질랜드에도 한우와 견줄 만큼 훌륭한 쇠고기는 존재한다. 심지어 일본의 와규는 세계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며 최고가로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는 역시 한우다.
안성기의 입맛은 영화계의 생리에 길들여져 있다. 쪽대본이 일상이고 작가의 전권이 각색을 원천봉쇄하며 토씨 하나까지 간섭하는 드라마 시스템은 익숙하지 않다. 배급사와 극장의 스케줄을 따르긴 하지만 그것은 제작 및 후반작업 일정보다 후순위인 영화와 달리 매일 혹은 주 단위로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드라마의 타이트한 제작시스템은 완성도를 제일 중요시하는 안성기의 체질과는 다른 식단이다.
게다가 TV에서 안성기 또래의 배우들이 자리 잡는 게 쉽지 않다. 만약 안성기가 드라마에 출연만 하겠다고 하면 잡겠다고 달려들 PD와 방송사는 장사진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에 안방극장에서 먹고 살아온 60대 남자배우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생태계 교란이다.
장인정신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전념하거나 한 가지 기술을 전공하여 그 일에 정통하려고 하는 철저한 직업정신’이다. 영화배우가 뭔 장인이냐고 콧방귀를 뀔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최소한 안성기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하나‘만’ 매진해왔고 그것을 지키려는 외골수 정신을 꼿꼿하게 지켜온 것만큼은 확실하고 그래서 영화계에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에게 있어서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출연은 명명백백한 외도다. 자기배신이고 이율배반이다. 물론 영화배우로도 그는 남부럽지 않은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지만 영화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드라마를 거부하는 것은 장인정신의 근처에는 갈 만한 성스러운 고집이고 뚝심이다.
영화가 드라마보다 우월한 컨텐츠라고 자랑할 순 없지만 최소한 영화인들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은 인정해줘야 한다. 심지어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가장 우선되는 할리우드에서조차 영화배우는 ‘Actor’나 ‘Actress’가 아닌 ‘Movie Star’로 별도 분류된다.
20여 년 전쯤 안성기가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당시 영화배우의 자존심은 개런티 1억 원을 넘느냐 그렇지 않느냐였다. 안성기보다 나이가 많은 한 영화제작자가 그를 캐스팅하면서 1억 원이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고, 그는 두말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조연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열었는데 대스타이자 나름대로 선배 격인 안성기가 앞장서 분위기를 돋우며 화합의 무드를 조성했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제작자는 안성기를 불러 점잖게 사과하며 1억 원을 채워줄 것을 약속했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권광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