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킹스맨’ 흥행, 히어로에 목마른 한국인
- 입력 2015. 03.20. 10:31:37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이제 스크린쿼터제 사수를 외치며 한국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애정을 보낼 때는 지났다는 정서가 1차원적인 애국심을 지배하는 분위기다. 농축산가에서 굳이 한우와 국산 쌀을 사랑해달라고 애원하지 않더라도 대중은 오랫동안 입맛에 길들여진 국산 농수축산물을 선호한다. 물론 주머니 사정 때문에 값싼 수입산을 장바구니에 담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하지만 외화나 한국영화나 입장료는 같기에 그런 슬픈 현상은 없다.
그래서 현재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의 돌풍은 대중에게 거부감이 없다. 과거 외화의 직접배급 초창기 극장에 뱀을 풀어도 정서적으로 용서가 되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내부적인 파이도 엄청나게 커진 한국영화계는 안정세다. ‘명량’이 1761만 명의 관객동원기록으로 역대 한국 극장가 흥행 1위를 지키는 가운데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한국영화의 강세가 단연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외화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아바타’가 1330만 관객으로 3위에, ‘겨울왕국’이 1029만 관객으로 11위에, ‘인터스텔라’가 1027만 관객으로 12위에, ‘아이언맨3’가 900만 관객으로 15위에 각각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 영화계가 더 이상 맹목적인 자국 콘텐츠 사랑에 기대선 안 된다는 증거다. 이제 영화는 경제난에 지칠 대로 지친 서민에게 ‘1만 원의 여유 혹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역대 수입 스파이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은 237만 관객의 ‘007 스카이폴’이고 유명한 ‘본 시리즈’ 중 ‘본 얼티메이텀’이 고작 199만 명을 동원했을 따름이다. 한국 관객의 정서에 스파이 시리즈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킹스맨’의 영국을 뛰어넘는 흥행돌풍은 굉장히 이례적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 영화를 제작 연출한 매튜 본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영국 런던 출신의 1971년 생으로 피터 잭슨보다 10살 젊다. 40대 중반이란 나이는 젊진 않지만 늙지도 않았다. 영화를 하기에 썩 괜찮은 나이란 뜻이다.
그런데 본의 영화 제작 데뷔작이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고 두 번째 제작품이 ‘스내치’다. 눈치 빠른 영화광이라면 본의 영화적 성향과 센스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후 그는 ‘킥 애스’ 시리즈를 연출 제작했고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그는 이미 히어로 영화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남다른 접근법이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영화가 유독 한국에서 크게 흥행에 성공한 이유는 상류사회에 거부감을 느끼고 희망이 없는 서민들의 B급정서를 제대로 관통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기어만큼 지적이지 않고, 휴 그랜트만큼 잘 생기지 않았으며, 휴 잭맨처럼 남성미도 풍기지 않는 콜린 퍼스가 천하무적 베테랑 스파이로 나온다. 게다가 중국 무협지의 영웅탄생 신화처럼 지질한 전과자에서 하루아침에 액션 히어로로 거듭나는 주인공이 키도 안 크고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데다 고급스러운 스타일도 아닌 ‘듣보잡 루저’ 테런 에거튼이라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한국 관객을 사로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의 액션에 태권도를 참고했다느니,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 신을 오마주했다느니 하는 표현은 흥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형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할리우드 미남스타들과는 방향이 다른 개성과 더불어 조금 부족해서 친근하고 그래서 그게 마음에 이끌리는 두 배우의 ‘적당한 모자람’이 답이다.
이 영화에 세련된 스토리나 소름이 돋는 반전은 없다. 때론 잔인하고 때론 어이없는 시각의 향연만 존재할 따름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복장과 액세서리를 모두 따라서 갖추자면 8000만 원이나 든다는 화려한 패션은 먼 나라 얘기다. 그런데 그게 머리 복잡한 지적인 게임의 참여를 강요하지 않고 가난함의 빈 공간을 채울 일시적 판타지라 좋다.
‘국제시장’이 한민족 특유의 가족적 정서에 힘입어 기성세대를 극장으로 끌어냄으로써 흥행에 성공했다면 ‘킹스맨’은 3포를 넘어 5포로 가는 20~40대 젊은 세대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대리만족의 욕구에 부흥했다.
1990년대 중후반 IMF시대를 전후해 젊은이들은 그나마 여가를 즐겼다. 해외여행이 더 이상 부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비행기를 안 타더라도 자신의 승용차로 도시를 떠나 경치 좋은 휴양지나 리조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나름대로 외모 치장에도 돈을 쓸 줄 알았고, 레저 취미 활동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스키와 스노보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한 게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의 지갑은 메말랐다. 4년제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든 것은 물론 소위 한국의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마저 구직난에 시달리는 대열에 끼어들어야 했다.
가까스로 구직을 해도 정규직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고 정규직이 되더라도 치열한 사내 생존경쟁의 서바이벌 게임에 뛰어들어야 했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쉽지 않아 1인가구가 늘어 식당과 마트의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다. 이쯤 되면 상실의 시대다.
그래서 1만 원 권 한 장으로 2시간의 자기만의 여유와 행복과 환상을 즐길 수 있는 ‘킹스맨’은 안성맞춤이었다.
‘킹스맨’은 단순히 스파이물로 분류할 게 아니라 ‘슈퍼맨’ ‘엑스맨’ ‘아이언맨’ 등의 히어로물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게 맞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 과정을 ‘취업’으로 표현한다. 정말 기가 막힌 한국적 정서의 시의적절한 파악이었다.
힙합 듀오 언터쳐블은 지난 18일 발표한 다섯 번째 미니음반 ‘헬븐(HEllVEN)’의 수록곡 0‘크레파스’에서 ‘내 조카 크레파스 18색깔’이라고 노래한다. 단어의 뜻을 버리고 음만 보면 어떤 뜻이 내포된 지 알 수 있다. 이런 가사가 인기를 얻는 ‘병맛’의 세상이다.
‘엑스맨’의 뮤턴트들은 사회의 이단아들이다. 보통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시돼 척결 혹은 처분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과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갑부다. 잘 생긴 독신이어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다. 그런 그들이 목숨을 담보로 영웅놀이를 한다.
뮤턴트의 정의는 당위성이 없고 배트맨과 아이언맨의 치기는 더 이상 누릴 게 없는 부자들의 새로운 놀이밖에 안 된다.
하지만 ‘킹스맨’의 스파이 활동은 최소한 생계를 위한다는 분명한 그리고 절실한 이유가 존재한다. 왜냐면 현재 대한민국의 3포세대부터 은퇴했거나 앞둔 가장들의 생계를 위한 고군분투가 바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치열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민들은 그들을 어려움에서 구출해줄 ‘히어로’에 목마르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 스스로 히어로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게 ‘킹스맨’ 흥행의 정답이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