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상회' 눈물 콧물 쏙 빼지만 가슴은 따뜻한[시네프리뷰]
입력 2015. 03.26. 17:40:49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강제규는 두 개의 블록버스터에서 분단을 소재로 사랑과 가족애의 묵직한 주제를 담아 한국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바 있다.

1999년 ‘쉬리’는 남북분단이라는 한민족의 아픔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총구를 겨눠야 하는 비극에 담아낸 수작으로 그보다 훨씬 뒤에 아주 많은 돈을 들여 제작된 ‘베를린’을 능가하는 첩보물로 한국 영화사에 남아있다.

또한 그는 2003년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남북으로 두 동강 난 한반도를 빗댄 두 형제의 비운으로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절절하게 그려냈다.

이렇게 진중하고 심각한 주제를 거대 자본의 힘을 빌려 자신의 훌륭한 필력과 꼼꼼한 연출력으로 표현해내던 강 감독은 그러나 2011년 말 역시 전쟁을 배경으로 한 ‘마이 웨이’의 참패로 흥행불패 신화를 멈추게 된다.

그리고 3년여만에 내놓은 ‘장수상회’는 강제규라는 브랜드가 무색하리만치 지금까지 연출한 대작들과 많이 다르다.

우선 강 감독은 이번 각본에 참여하지 않았다. 더구나 블록버스터가 아닌, 잔잔한 드라마다. 주제는 사랑인데 ‘쉬리’처럼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거론한 게 아니라 그저 우리 일상에서 있을 법한, 그러나 참으로 쉽지 않은 진정한 남녀 간의,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을 소름 돋게 그렸다.

인트로는 1960년대의 논과 밭의 시골풍경인 서울 수유동 비포장 도로 위를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버스에서 시작된다. 버스가 멈춘 곳에서 아주 맑은 이미지의 한 여고생이 내리고 순진한 남고생 한 명이 그녀의 뒤를 좇는다.

그리고 시간은 점프해 현대의 복잡하지만 아직 개발이 덜된 수유동의 서민 마을로 바뀐다.

단독주택에서 혼자 사는 80살 즈음의 노인 김성칠(박근형)이 쓰레기 봉투를 들고 대문을 연다. 앞집에 새 주인이 이사 오는 모양이다. 이삿짐 트럭이 좁은 골목을 막고 있어 통행이 불편하다. 평소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틈만 나면 성질을 부리는 까칠한 성칠에게 이 상황이 맘에 들 리 없다. 앞집에 이사 온 또래의 할머니, 임금님(윤여정), 그녀의 딸 민정(한지민), 그리고 민정의 어린 딸에게 호통을 치는 것도 모자라 트럭을 발로 차며 빨리 이동하라고 호통을 친다.

그는 동네에서 제일 오래됐고 제일 큰 장수마트를 오랫동안 지켜온 모범직원이지만 마트 안에서 손님들에게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마트 사장 장수(조진웅)는 성칠의 투정과 심술을 다 받아주며 “어르신이 우리 마트의 간판”이라고 예의를 다한다.

금님은 동네에 꽃집을 차리고 딸과 손녀와 살아간다. 민정은 남편과 이혼했고 그 남편은 새 장가를 간다고 민정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런데 곱게 늙은 금님이 혼자 사는 성칠의 안위가 걱정돼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 가지 오해로 서로 어색해진 일을 계기로 금님이 성칠에게 밥을 사라고 요구하고 성칠은 장수에게 여자와 데이트하는 요령을 배운다.

이렇게 외롭게 살아온 성칠은 늘그막에 ‘여친’이 생겨 그동안 우울했던 생활의 패턴과 행복지수가 달라진다. 그런데 어느 날 또래의 비슷한 남자가 찾아와 금님과 다투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녀의 남편임이 분명하고 돈 문제로 다투는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이들을 바라보는 민정의 시선은 영 불편하다. 어느 날 민정은 문 앞에서 귀가하는 성칠을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부탁한다. “아저씨, 우리 엄마 만나지 말아주세요”라고.

한편 장수는 동네 재개발 추진에 앞장서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재개발 및 재건축에 대한 동의서를 받는데 유일하게 성칠만 고집을 부리며 도장을 내놓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동네가 바뀌면 땅값이 오름은 물론 대단지 아파트 유치로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칠은 사장이지만 자신을 감언이설로 꼬드기려는 장수가 못마땅하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그로서는 그냥 오래 살아온 그 집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 재개발로 얻을 이득 따위는 관심 밖이다. 다만 집안의 방 중 유일하게 잠겨있고 열쇠를 어디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작은 방 하나를 여는 게 그의 생활에서 큰 숙제다.

그리고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이미 금님에게 마음이 넘어가 있는데 그녀의 딸이 둘 사이를 막는다. “제가 뭔데 만나라 말라야?”라고 투덜대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썸타기’를 이어가던 중 금님이 주말에 인천으로 꽃구경을 가자고 약속해놓곤 막상 그날이 되자 휴대전화도 안 받고 잠적한다.

그에게는 모르는 금님의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췌장암으로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었다.

영화는 112분의 러닝타임 중 70~80분이 마치 TV 단편드라마처럼 소소하게 흘러간다. 감독은 관객이 지루해할 것을 염려해 커트를 짧게 가며 속도감을 준다. 때론 이 작품에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헬리캠도 마다하지 않는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큰 재미는 없다. 하지만 이는 후반부의 대반전과 눈물 콧물 쏙 빼놓는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이다.

금님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 드라마의 엄청난 반전이 밝혀지고 감독은 관객에게 ‘삶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진지한 고찰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혼한 민정과 달리 장수는 사별한 뒤 여고생이 된 무남독녀를 키우며 살고 있는데 비슷한 환경의 부녀가 가질 법한 고민과 갈등을 겪는다. 장수는 딸이 남자친구와 단 둘이 있는 게 불안하고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가 하면 아버지의 담배 몇 개비를 몰래 빼내는 불량딸은 아버지 곁에 찰싹 붙어있는 다방 여종업원 언니가 밉다.

장수에게는 동네 중국집 사장과 세탁소 사장의 죽마고우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외롭지 않다. 더구나 다방에서 일하는 껄렁한 ‘노는 언니’ 한 명이 그라면 죽고 못 산다. 마트가 쉬는 날 조기축구회에 나가 운동을 한 뒤 동네 사람들을 중국집으로 불러 모아 회식을 여는 재미는 여가와 유흥의 백미다.

감독은 이렇게 소시민의 사회를 아주 평범하고 담담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훑어보면서 관객의 가슴에 깊은 비수 하나를 꽂는다. “자식이 부모에게 뭔지 알아? 평생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커다란 돌 같은 게 자식이래”라고.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이자 뛰어난 흥행의 승부사였던 강제규가 변했다. 변해도 아주 많이 변했다. 그의 변화는 ‘마이 웨이’의 흥행참패로 인한 안전주의인가, 아님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배려하고 돌봐야 하는 자신의 위치에서 일기장을 쓰고자 했던가? 최소한 그는 성칠의 고교시절 일기장을 통해 자신의 지난 일기장을 다시 들춰보고 오늘 밤에 쓸 일기를 준비하는 것은 맞는 듯하다.

재개발 회사를 자신의 이름을 딴 ‘JK’로 표기한 센스는 어쩌면 비슷한 주제의 ‘국제시장’을 연출한 후배 감독 윤제균(그의 회사명이 JK픽쳐스)에 대한 공감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강제규 감독의 변화를 그의 골수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박근형과 윤여정의 연기력과 강 감독의 새롭게 변한 연출의 시각은 관객의 감동을 최대한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내달 9일 개봉.

사족: '꽃보다 할배'에서 박근형과 티격태격 하던 또 다른 꽃할배 한 명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장수상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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