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화장’과 ‘장수상회’의 낮고 깊은 울림
- 입력 2015. 04.06. 15:20:15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오는 9일 나란히 개봉되는 임권택 감독의 ‘화장’과 강제규 감독의 ‘장수상회’는 각별한 의미를 내뿜는다.
현재 한국영화의 상업적 문법은 할리우드의 흥행의 법칙에 충실한다. 한국영화 초대 전성기인 1960~70년대 제작자들이 ‘땅 팔고 집 팔아’ 마련한 돈을 전대에 차고 촬영현장을 누비던 ‘구멍가게’ 시스템과 달리 할리우드의 메이저스튜디오 같은 대기업의 투자배급사가 마련한 돈으로 하도급 형식으로 운영되는 현재의 제작형태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이번 두 작품은 이들의 기존 행보와는 사뭇 혹은 완전히 다르다.
‘씨받이’ ‘아다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연산일기’ 등 한국적 정서에 충실해온 임 감독은 1990년을 열면서 대놓고 ‘그동안 나를 위해 제작비를 투자해준 제작자를 위해’ 상업적으로 외도하겠다며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만들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 ‘춘향뎐’ 등을 만든다.
감독 초기 그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평범한 연출자였지만 ‘족보’(1978년) ‘깃발 없는 기수’(1979년) ‘만다라’(1981년) 등으로 한국적인 삶을 본격적으로 그리더니 1985년 ‘길소뜸’을 계기로 확실한 자기 이데올로기를 갖추기(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화장’은 아주 많이 다르다. ‘장군의 아들’처럼 드러내놓고 돈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노는 계집 창’처럼 작가주의를 표방한 돈벌이의 양수겸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취화선’처럼 대놓고 해외에서 각광받겠다는 의도는 더욱 없다. 실제 나이 82세의 이 노익장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어눌한 말투 속에 매번 언중유골을 담아내듯 이 무채색의 화면 속에 피카소 같은 추상화를 마음껏 펼쳐내고 있다.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아내(김호정)의 간병과 회사 일 두 가지에만 충실해온 오 상무(안성기)가 어느 날 입사한 풋풋하면서도 섹시한 부하 직원 추은주(김규리)에게 흔들리는 게 기둥줄거리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삶은 우리네 일상과 별 다를 바 없다. 적지 않은 규모의 화장품 회사와 오상무의 집 그리고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주 무대다. 회사원들은 우리가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샐러리맨들의 평범한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곧 죽는 아내 역시 그리 희귀한 캐릭터도 아니다.
오 상무는 꽤 성공한 남자다. 50대 후반쯤 됐을 이 남자는 아내를 잘 만나 10억 원짜리 큰집에 살며 서울 외곽에 별장도 소유하고 있다. 회사에선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중역이다.
그런 즈음의 위치라면 꼭 아내가 죽을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지 않더라도 젊은 여자에게 최소한 한번쯤은 한눈을 팔게 돼있다. 그게 남자다.
하지만 오 상무는 대다수의 천박한 중년 ‘상무님’과는 다르다. 그는 지위를 이용해 부하 직원을 성희롱하지도 않고, 돈을 자랑삼아 룸살롱에 드나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남편 겸 아버지로서의 양심과 원초적 욕망의 중간에서 마음의 무게중심을 못 잡아 갈팡질팡할 따름이다.
만약 그의 일탈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저급한 성욕일 뿐이었다면 이 영화는 싸구려 에로물 수준에 그쳤을 테지만 임 감독은 그런 작품에 손 뗀 지 이미 오래다. 감독은 자칫하면 수평적 수준에 머물렀을 이 흔한 소재를 자신만의 밀도 있고 심도 깊은 내면의 묘사 기법으로 다차원적 구조로 그려낸다.
그리고 결말을 열어놓고 관객의 상상과 판단에 그 일탈과 순수의 경계와 결정을 맡긴다. 거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오 상무의 심리묘사를 교과서적 기법 안에 담아내는 차분한 연출과 그 의도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연기를 펼치는 안성기와 김호정의 성심성의는 압권이다.
강제규 감독의 가장 강제규 답지 않은 ‘장수상회’는 초반이 지루하다. 타협이나 배려와는 거리가 먼 까칠한 고집불통의 70대 노인 김성칠(박근형)은 앞집으로 이사 온 꽃가게 할머니 임금님(윤여정)과의 첫 만남부터 심통을 부린다.
서울 한복판이지만 4대문 안의 도심이나 강남과는 거리가 먼 수유리의 제법 큰 마트에서 일하는 성칠은 사장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주변사람들, 심지어는 마트 손님에게조차 불친절하고 자기위주다.
그런 그가 아주 빠르게 금님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다.
이렇게 블록버스터의 상업적 연출에 익숙한 강 감독은 한 편의 노인동화 같은 러브스토리를 느리게 걷기 식으로 만보기의 수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펼쳐간다. 그런데 금님에게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음을 서서히 암시해가면서 이 드라마는 ‘식스 센스’ 급의 반전을 펼치면서 관객의 눈물과 콧물을 사정없이 흡입한다.
만약 박근형과 윤여정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을까? 영화 ‘여배우들’이나 ‘돈의 맛’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캐릭터의 이미지가 짙은 그녀는 드라마 ‘참 좋은 시절’에 이어 또 하나의 순애보적 캐릭터를 그려냈으며 박근형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정점을 찍을 명불허전 연기를 뽑아냈다.
이 두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가족이다. 오 상무가 은주에게 이끌리고, 그 이끌림이 통해 두 사람의 사이가 발전할 수 있음에도 갈등하고, 그래서 외로우며, 그것 때문에 모든 색깔이 침울한 것은 가슴 한구석에 박혀있는 큰 돌 같은 가족 때문이다.
‘장수상회’ 역시 이를 웅변한다. 자식이란 존재는 평생 가슴 한편에 품고 살아가야 할 큰 돌이라고.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두 영화는 비록 화법은 다를지언정 결론은 하나같다. 충동과 본능은 동물적이지만 사랑은 이성이 근거가 되는 자제와 의리라고.
아름다운 17세 연하의 여배우를 아내로 맞아 평생을 ‘짐 싸는 남편’(영화 하나 끝날라치면 또 다시 촬영차 짐을 싼다고)으로 살아온 82세의 노장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이제는 늙은 할머니가 된 아내의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걷는 모습은 ‘장수상회’와 오버랩 되고, 관객이 원하는 것을 잘 파악하는 영악한 작가에서 돈의 논리를 꿰찬 연출자 겸 제작자로 불꽃처럼 살아온 50대 중반의 감독이 이제 한 걸음 물러서 ‘화장’의 오 상무처럼 가족의 소중함을 잔잔하게 노래한다.
‘화장’과 ‘장수상회’의 마무리는 같지만 다르고, 메시지는 다른 듯 같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