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화장’과 ‘장수상회’가 그리는 사랑이란?
- 입력 2015. 04.07. 11:21:45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할리우드에서 로맨틱코미디 혹은 멜로는 ‘대박’ 확률은 높지 않지만 가장 쉽게 만들어 가장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장르라 수많은 감독이나 제작사가 선호한다. 하지만 국내 시장은 좀 다르다.
역대 1000만 관객 영화를 보면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해운대’ ‘괴물’ ‘왕의 남자’ ‘변호인’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도둑들’ ‘국제시장’ ‘명량’, 외화 ‘아바타’ ‘겨울왕국’ ‘인터스텔라’ 등이다. 여기서 멜로는 ‘왕의 남자’가 유일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정통 멜로를 그린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경우 200만 관객이면 ‘성공했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보통 평균 총제작비 50억 원 안팎이니 그 정도 관객이면 100% 수익률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로맨틱코미디인 ‘귀여운 여인’은 전 세계적으로 5000억 원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역시 블록버스터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사람들이 문명을 탄생시킨 이래 가장 큰 값어치의 감성적 감정으로 여겨왔고, 그래서 소중하게 생각해온 ‘손에 쥘 수 없는 보물’이다. 그렇기에 가장 예술적인 대중문화 콘텐츠인 영화에서 사랑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소재다. TV 드라마가 가족과 사랑을 필수요소로 삼는 것 역시 당연하다.
오는 9일 나란히 개봉되는 ‘한국적 거장’ 임권택 감독의 ‘화장’과 ‘한국의 블록버스터 작가’ 강제규 감독의 ‘장수상회’는 이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박찬욱 봉준호 등 21세기 한국영화를 전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젊은 감독들이 고개 숙여 존경심을 표시하는 임 감독과, 한국영화계에서 처음으로 블록버스터를 시도한 강 감독이 의외의 잔잔한 흐름 속에서 밝거나 어두운 사랑얘기를 그리는 이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화장’의 사랑은 어둡고 슬프고 처량하며 비극적이다. 국내 내로라하는 화장품 회사의 오 상무(안성기)는 오너가 각별하게 챙길 정도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50대 후반쯤의 남자다. 아내(김호정) 덕에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었고 지금의 10억 원짜리 집과 서울 근교의 별장까지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내는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다.
딸은 울먹이며 오 상무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엄마를 사랑하긴 했냐’고. 그렇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오 상무는 사랑으로 아내와 결혼했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결혼했고, 극진하게 간병하는 이유 역시 사랑이 아닌, 책임감 때문이다. 회사에 열심히 봉사하듯.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홍보팀장으로 매력이 넘치는 30대 초중반의 추은주(김규리)가 스카웃됨으로써 그의 인생에 커다란 파문이 인다. 오 상무는 자신의 사무실과 은주의 책상 사이에 가로막힌 유리를 통해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욕망 혹은 일탈을 굳이 거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오 상무에게 은주는 청첩장을 내민다. 하지만 결혼식 날 신랑의 전 애인이 나타나고 결혼은 깨진다. 그 후 은주는 오 상무와의 단둘만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술에 취해 전화를 건 남편이 될 뻔했던 전 애인과의 통화를 스스로 봉쇄한다. 화면에 미묘하게 그려진 은주의 심리는 오 상무의 속내를 어느 정도 읽었고, 그녀 역시 그런 그가 싫진 않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른 오 상무는 은주의 전화를 안 받는다. 그리곤 혼자 별장으로 향한다. 은주는 그에게 지금 별장으로 가고 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는 죽어가는 아내와의 마지막 성관계 중 은주의 나신을 상상했던 욕망과는 달리 끝내 은주를 회피한다.
그가 은주를 향해 품는 욕망은 단순한 성욕이라기 보단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사랑이고, 아내와의 마지막 잠자리는 의무라기 보단 의리고 인사다. 그는 그동안 사랑 없이 아내와 자고 아이를 낳았으며 아내 덕에 오늘날의 풍요를 누린 데 대해 아내에게 감사하고, 끝까지 아내를 잘 보내줄 테니 마지막 남은 생을 아무 걱정 없이 마무리하라는 의리를 바탕으로 한 인사를 건넨 것이다.
그는 서민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나약한 중장년 가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음속으론 일탈을 꿈꾸거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정열적인 사랑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빠져보고 싶은 젊은 용기가 실오라기 하나 남아있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 상무는 지위와 경제력을 지녔기에 할 수 있지만 하지 못한다. 안 하는 게 아니라. 그건 또래의 가장들의 현실의 대입이다.
사실 실제 그 나이대의 가장은 돈도 용기도 정열도 많이 부족하다. 감성과 욕망과 열정은 남아있지만 현실의 차가운 온도는 그 열정과 욕망을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상무의 사랑은 아프다. 사랑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내 이제 아내와 사별한 뒤 자연스럽게 진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세월이 그의 용기를 갉아먹었다.
그에 반해 ‘장수상회’의 70대 중반의 노인 김성칠(박근형)은 강하고 적극적이다. 서울 치고는 덜 발전한 수유리의 마트 장수상회에서 일하는 성칠은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임금님(윤여정)이 자신이 사는 집 앞집으로 이사 오는 첫날부터 심통을 부리지만 밥을 사라는 금님이 싫지 않다.
그런데 사실은 동네의 재개발추진위원장 직을 맡은 마트 사장 장수(조진웅)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재개발을 반대하고 있는 성칠을 설득하기 위해 꾸민 미인계다. 하지만 이 두 노인들은 자꾸 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빠져든다. 다 늙어 죽을 날을 손꼽을 법한 나이에 회춘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면서 잠들기 점 머리맡에 전화기를 놓을 정도로 설레는 밤을 보낸다.
남들과의 소통에 인색했고 심지어 지나치게 자기위주여서 남에게 불친절했던 성칠은 연애를 위해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개통한 뒤 슬며시 금님에게 들키게끔 연기한다.
평생 안 가봤을 양식 레스토랑으로 금님을 데리고 가서 스테이크를 써는가 하면 할인쿠폰이 있느냐고 묻는 웨이터에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남자’의 위용을 뽐낸다.
사랑에 빠지는 초기단계의 모든 사람들은 동화 속을 걷는 듯하다고 입을 모은다. 머릿속엔 항상 아름답고 긍정적이며 흥분되는 상상으로 가득하고, 그 부푼 마음은 저도 모르게 입가의 미소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얼굴에 쓰여 있다고 한다.
성칠과 금님이 그렇다. 금님의 강한 요구에 원래 무서워서 질색인 롤러코스터를 타며 ‘나한테 왜 이래요’라고 비명을 지르는 성칠은 그러나 내려와 화장실에 앉아 구토하는 금님을 위해 사람들 많은 화장실 앞에서 노래를 불러준다.
사랑은 수치심을 없애줄 정도로 유치하지만 너그럽다. 사랑은 천성을 바꿔줄 정도로 부드럽고 온화하며 솜사탕처럼 실속은 없지만 한없이 달콤하다. 아니, 실속을 챙기려 들지 않는 게 사랑이다. 그걸 성칠과 금님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반전은 관객들의 두 눈에 쌍폭포를 만들어낼 터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사랑이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더욱 눈물샘을 자극한다. ‘화장’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장수상회’는 ‘인생은 아름다워, 사랑이 있어서’다.
미국의 앤디 워홀은 ‘섹스는 역사상 가장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고 했다. ‘화장’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미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니까 당신이 필요하다고 한다’고 했다. ‘장수상회’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