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화정’ 광해 차승원 인조 김종학의 메시지
입력 2015. 04.14. 10:28:09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지난 13일 첫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이 10.5%의 2위 시청률로 산뜻한 출발을 알렸다. 시작 전부터 호화캐스팅과 대규모 제작사이즈로 이미 돌풍을 예고했는데 첫 회부터 앞으로 안방극장에 일으킬 일진광풍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한다.

‘화정’은 이래저래 의미가 깊다. 제작사가 지난 2013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안방극장의 스티븐 스필버그’ 김종학 PD의 이름을 내건 김종학 프로덕션이다.

고 김 PD는 드라마계의 미다스의 손이었고 장례식장에 유명 배우들이 대거 몰려들었듯 업계의 ‘어른’이었다. 그리고 김종학 프로덕션 역시 외주제작사의 사정이 굉장히 어렵던 시절 삼화프로덕션 등과 함께 방송가의 외주제작 시스템을 정립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선구자다.

그런 김종학이지만 MBC ‘태왕사신기’는 성공시켰건만 SBS ‘신의’는 혹평을 받았다. 여기서 돈 문제로 잡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종학 프로덕션 입장에선 ‘화정’이 회사의 정통성과 투명성 그리고 스케일을 입증할 리트머스 시험지다. 고인이 하늘에서 이 작품을 보고 있다면 최소한 ‘태왕사신기’나 ‘신의’와는 차원이 다른 시각에서 조명하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선조 사후 혼돈의 정국에서 가까스로 왕위에 앉아 나름대로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외교를 펼치지만 결국 중신들의 눈 밖에 나 조카인 인조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광해의 얘기는 현대적 시각으로 봐도 어쩐지 낯설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뼈대로 픽션을 가미한 캐릭터의 재창조 등으로 새롭게 스토리를 짜낸 ‘화정’은 아직 첫 회 방송에 불과하지만 작가와 제작사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끼는 다수 국민의 마음을 읽은 것 같아 보여 더욱 시청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첫 회 야외에서 조정의 대신들을 모아놓고 계곡물에 술잔을 띄워 시조 짓기 놀이를 즐기던 선조(박영규)는 갑자기 시제로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 등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사건)을 내건다. 즉, 그가 스스로 세자로 봉했던 서자 광해군(차승원)을 폐위하고 인목대비(신은정)와의 사이에 낳은 적자 영창대군(전진서)을 세자로 책봉하겠다는 뜻이고, 이에 대한 대신들의 충성심을 묻는 것이었다.

이렇게 첫 회부터 스피디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긴박하게 전개된 ‘화정’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의 수장인 정인홍(남명렬)과 선조와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시청자에게 묻는다. 과연 왕(王)이란 무엇이고, 왕재(王才)란 어떤 인물인가?

정인홍은 선조를 찾아가 “저하를 세자로 세운 건 전하이십니다. 지난 날 전하와 충신들이 백성을 버렸을 때 목숨을 걸고 지킨 건 세자 저하였습니다. 세자 저하는 모두가 기다리는 성군 중 성군이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한다. 과거 임진왜란 때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광해는 그를 살렸고 군과 백성을 이끌고 전장의 앞에 서서 결국 나라를 지켜냈다.

그러자 선조는 “그래서 폐하려는 거다. 서자인 그가 그런 것이 임금인 날 우습게 만든 역심”이라고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한다.

그래서 선조는 왕은, 왕재란 ‘백성을 지키는 마음’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인홍은 ‘왕재란 핏줄이 아니라 성군의 자질’이라고 광해가 선조보다 더 뛰어난 성군이 될 것임을 주장하는 데 서슴없다.

또한 대중의 유머 속에 흔히 등장하는 ‘간신나라 충신’도 있다. 광해의 친형 임해군(최종환)은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게 억울할 틈이 없다. 왜냐면 광해가 세자로 책봉된 지 16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명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광해군 세력의 선봉에 서서 무력진입을 주장함으로써 제 살길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대보름을 기념해 열린 연회장 한 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그에게 이복동생인 정원군이 괜히 선조의 눈 밖에 나지 말고 그의 마음에 든 영창대군 측에 바짝 조아리는 게 살 길이라고 이죽거린다.

적자인 영창이건 서자인 광해 임해 정원 등은 모두 선조의 자식이다. 하지만 선조가 광해를 정적으로 보듯 이 궁궐 안에서 이복형제는 물론 친형제조차 정권에 기준하면 모두 정적일 수도 우방일 수도 있다.

그런 논리라면 서자 출신인 정원군은 당연히 광해의 편이어야 하나 헤게모니의 흐름에 따라 재빠른 처세술로 영창 측에 붙었다. 정말 간신나라 충신인데 이런 사람이 현재에도 다수 존재한다.

일단 이 드라마의 출발은 좋다. MBC 50부작 대하드라마 중 ‘마의’가 성공한 전례가 있는데 스케일 면에서 ‘마의’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화정’을 보는 눈은 호강한다. 게다가 전작인 ‘빛나거나 비치거나’ 역시 성공한 사극이어서 그 아련한 향수를 이으려는 시청자들의 욕구에 잘 맞아떨어진다.

첫 회에 장렬하게 사라졌지만 코믹전문 박영규의 진지한 분노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다. 출연진 중 몇 명을 제외하곤 맏형인 그는 후배들에게 ‘얘들아, 사극연기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교과서적 지침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코믹전문배우에서 시대추리극 ‘혈의 누’를 통해 진지한 배우로의 변신에 성공한 뒤 승승장구해온 차승원의 연기는 역시 박영규에게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으며 시청자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지나치게 잘 생기고 서구적인 얼굴과 체형, 그리고 ‘삼시세끼’로 굳어진 ‘차줌마’의 이미지다.

왠지 갑자기 용포 대신 말끔한 더블버튼 양복 수트를 입고 등장할 것만 같은 럭셔리 이미지나, 뜬금없이 수랏간에 들어가 기미상궁 김개시(김여진)를 밀치고 거북손 요리를 만들 것 같은 ‘삼시세끼’의 파급효과는 최소한 ‘화정’의 비운의 왕세자 광해 역할엔 독이다.

조성하(강주선) 이성민(이덕형) 엄효섭(홍영) 김창완(이원익) 김승욱(이항복) 정웅인(이이첨) 정명공주(이연희) 홍주원(서강준) 강인우(한주완) 등 초호화캐스팅 역시 작품 자체와 제작사의 힘이 일궈낸 쾌거로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요소로 부족함이 없지만 왠지 첫 회부터 ‘비밀의 문’이 보임은 분명 긍정적 요소는 아니다.

‘화정’처럼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치적 맞대결이 ‘비밀의 문’의 주요 소재였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첫 왕인 선조가 비교적 적통이라면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가진 영조는 노론의 도움이 없었다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을 서통 중의 서통이다. 물론 이것이 ‘비밀의 문’의 ‘비밀의 열쇠’로 작용해 극의 서스펜스를 이끌어갔다.

‘비밀의 문’은 첫 회 시청률 2위로 산뜻하게 출발한 뒤 2 회 만에 1위를 꿰찼으나 이후 점점 하락해 중반 이후에는 참담한 시청률로 용두사미의 대표적인 드라마로 자리 잡았다. 24회였던 게 다행이었다.

물론 ‘화정’이 광해 한 명에게만 초점을 맞춘 중장편이 아니란 점은 희망적이다. 제작진은 초반에는 광해가 주인공이지만 선조의 유일한 적통공주였으나 광해군의 보위 등극 후 천민으로 추락한 뒤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정명을 비롯해, 반정을 통해 그토록 그리던 권좌에 오른 후 패도의 길을 걸었던 야심가 인조(김재원), 정인의 원수를 주군으로 모신 비극적 사랑의 홍주원(서강준), 사랑을 위해 가문을 버리고 인조를 택한 킹 메이커 강인우(한주완) 등 당시의 다양한 인물군상을 회를 거듭하며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첫 단추는 잘 채웠지만 박영규가 사라진 뒤 극을 이끌어야 할 차승원의 존재감이 승부수이자 변수다. 그의 연기력은 문제가 안 된다. 다만 어떻게 얼마만큼 시청자를 속여 광해로 착각하게끔 만드느냐가 숙제다. 드라마 속 광해는 서른셋 정도, 실제 차승원은 마흔여섯이다. 아무리 배우라지만 ‘화장’의 오상무(안성기)나 ‘장수상회’의 김성칠(박근형)도 배우보다 13살 아래 배역은 아니다.

더구나 차승원은 동갑내기 배우 이병헌보다 더 무게감이 느껴진다. 노숙하단 의미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MBC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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