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와우! 폴 매카트니, 왜 비틀즈인가?
- 입력 2015. 05.04. 11:40:11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요즘 연예기획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예외 없이 상단에 자사 소속 연예인의 명단을 소개하는 카테고리가 ‘Artist’로 돼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연예인을 광대나 딴따라라고 비하할 순 없지만 최소한 박진영이 외치는 ‘딴따라’라는 단어 속에 담긴 중의적 표현에 근거할 때, 그리고 대중문화와 예술의 극단을 비교할 때 연예인이 문화예술인인 것은 맞지만 누구나 예술가는 아니다.
비틀즈가 왜 위대한지는 다음의 전무후무한 기록이 먼저 입증한다.
비틀즈는 미국에 진출하던 1964년 전체 싱글 레코드 판매고의 약 60%를 휩쓸었다. 한마디로 ‘싹쓸이’다. 그들이 초창기 섰던 캐번 클럽의 총 294회 공연을 비롯해 영국 BBC 총 275회 공연 등 가장 많은 라이브 무대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빌보드차트 ‘핫 100’(싱글 차트)에 ‘Let It Be’ ‘Yesterday’ 등 총 21곡의 최다 1위곡 보유 기록과 동시에 빌보드차트 총 113 주(약 2년 2달)의 최장기간 1위 기록을 올렸다. 참고로 빌보드 앨범차트 최장기간 등재 기록은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으로 1973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741주 동안 빌보드 톱 200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45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핑크 플로이드 역시 비틀즈에 영향을 받은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프로그레시브록 그룹 중 하나다.
비틀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약 16억 장(2013년 12월 RIAA-미국 공식 음반판매 집계기관-기준)의 앨범을 판매한 그룹으로 기록돼 있는 동시에 6 장의 미국 내 최다 다이아몬드 인증 앨범(1000만 장 이상 판매 앨범 수) 보유 그룹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기록은 불멸의 히트곡 ‘Yesterday’를 전 세계 약 3000여 명 이상(2014년 2월 CBS News 보도 자료)의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것으로 웬만한 불멸의 클래식 음악에 버금가는 위업이다. 가장 쉽고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정서적 록클래식으로 손꼽히는 곡이다.
1960년대 비틀즈는 특유의 더벅머리와 모즈패션을 유행시켰으며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로 하여금 ‘Norwegian Wood’를 소재로 한 소설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으로 일본 문학사에 한 획을 긋도록 영향을 끼쳤으며, 기 랄리베르테가 서커스 쇼 ‘태양의 서커스-러브’로 큰 성공을 거두는 데 영감을 줬다.
최근 네드 벤슨 감독은 비틀즈의 ‘Eleanor Rigby’에서 영감을 얻어 걸작 멜로영화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를 만들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후 존 레넌은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반전운동에 앞장서 수많은 미국과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영국 BBC의 라디오 프로듀서 빅 갤로웨이(Vic Galloway)는 “팝 음악의 역사는 비틀즈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했다. 그만큼 비틀즈는 데뷔 이래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음악은 물론 패션 문학 미술 이념 등 문화 예술 사조 등 사회의 전방위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60년 초 존 레논(보컬 기타), 폴 매카트니(보컬 기타), 조지 해리슨(기타), 스튜어트 셔트 클리프(베이스), 피트 베스트(드럼) 등 다섯 명으로 이뤄진 영국 리버풀 출신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건너온 로큰롤의 영향을 받아 Long John and the Silver Beatles, 실버 비틀즈 등의 그룹명으로 빌 헤일리 앤 더 카미츠,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와 크리켓츠 등을 흉내 내다 Crickets(귀뚜라미)에 대항해 Beetles(딱정벌레)라는 간단한 이름을 쓰자는 데 착안해 비트를 강조한 지금의 비틀즈로 최종 그룹명을 확정한다. 그리고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을 만나고 스튜어트 셔트 클리프가 탈퇴한 뒤 피트 베스트를 해고하고 대신 링고 스타를 영입하면서 저 유명한 팝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비틀즈는 1970년 4월 10일 폴 매카트니가 솔로 앨범을 발매함과 동시에 탈퇴를 선언하고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플래스틱밴드를 결성하고 반전과 평화 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전위예술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이 미국의 월남전을 지원하자 레넌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받았던 대영제국 공로훈장을 미련 없이 반납한다.
조지 해리슨은 이미 인도 힌두교에 심취해 라비 샹카로부터 인도의 전통 현악기 시타르를 사사해 ‘Norwegian Wood’에서 들려준 바 있고 그런 그의 정서는 비틀즈의 가장 위대한 명반으로 손꼽히는 더블 컨셉트 앨범 ‘The Beatles’(일명 ‘White Album’)에 수록된 자작곡 ‘While my guitar gentley weeps’에서 잘 드러난다.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도 그룹 해체 후 그동안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자작곡 위주로 비틀즈에서 활동하느라 억눌렀던 음악적 개성과 욕구를 마음껏 발산한다.
존 레넌은 1980년 12월 8일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폐암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비틀즈가 위대한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초기에는 아이돌그룹 성향의 말랑말랑한 음악으로 여성팬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지만 미국진출 후 음악성향이 진보적 전위적으로 확 바뀌며 록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
데뷔곡 ‘Love me do’부터 불멸의 히트곡 ‘I Wanna hold your hand’같은 곡들은 오늘날에 비교하면 빅뱅이나 2PM이다. 하지만 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 칭송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와 ‘The Beatles’(White Album)는 비틀즈 이후 쏟아져 나온 록음악의 모든 하위장르 및 그에서 파생된 재즈록퓨전(퓨전재즈)이나 크로스오버까지 전 세계 대중음악이 할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제시했기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다. 왜냐면 그들의 음악 속에는 록뿐만 아니라 컨트리 블루스 리듬앤블루스 재즈 등이 모두 골고루 녹아있었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 다양하게 표출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갤로웨이가 감히 팝음악의 역사가 비틀즈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비틀즈는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사조를 만들었다. 로큰롤은 이미 오래 전 유럽의 백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을 개척(침략)할 당시 원주민들의 블루그래스 음악에 포크를 가미해 만든 컨트리앤웨스턴과 이후 북미대륙으로부터 끌려온 아프리카 출신 흑인노예들이 만든 블루스에 미국의 백인이 리듬을 입혀 리듬앤블루스를 만든 뒤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결합해 탄생된 음악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유럽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영국 및 유럽인들은 이 로큰롤을 수입해 열광했지만 비틀즈를 계기로 롤링 스톤즈, 더 후,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등의 하드록 그룹이 ‘브리티시 인베이전’ 바람을 타고 미국의 팬들을 강타했고 그런 현상은 이후에도 듀란 듀란, 더 웸 등을 통해 계속됐다. 1970년대 미국은 비틀즈에 대항하겠다고 그들을 벤치마킹한 몽키즈를 내놨지만 망신만 당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이후 팝을 필두로 한 미국과 유럽의 대중음악을 급속도로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비틀즈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틀즈를 모방한 남성 4중창단 바람이 거세게 불어 블루벨스, 쟈니브라더스, 멜로톤사중창단 등을 대거 배출하는 과정에서 봉봉사중창단이 ‘Ob-la-di Ob-la-da’를 ‘꽃집의 아가씨’라는 번안가요로 리메이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1962년 10월 첫 싱글 ‘Love me do’로 데뷔해 13집 앨범 ‘Let it be’를 마지막으로 1970년 5월 공식 해체하기까지 비틀즈의 활동 기간은 7년 7개월에 불과하지만 해체 후 45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인기는 여전하며 그 음악의 영향은 곳곳에 녹아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었을 때 미국 언론은 ‘왕의 죽음’으로 표현했지만 비틀즈의 해체와 존 레넌의 죽음은 ‘음악의 죽음’으로 표현했을 정도다.
폴 매카트니는 지난해 첫 내한공연을 추진하던 중 가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세월호를 언급했으며 “거지같은 정치이념을 단번에 가로질러 남북의 경계선 그 바로 위에서 하는 콘서트가 곧 실현될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 그의 내한공연은 4만6000석의 유료 객석 가운데 4만5000석 이상의 98%의 판매율을 기록했으며, 장장 2시간 30분의 러닝타임 내내 73세의 그는 나이를 잊게 만드는 체력과 열정으로 가랑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에 심취한 관객들에게 100%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의 완벽한 콘서트를 선사했다는 찬사를 이끌어 냈다.
비틀즈 해체 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윙스로 비틀즈 시절의 하드록을 연상케 하는 ‘ Monkberry moon delight’ 등을 히트시키며 비틀즈 해체 후 지금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비틀즈의 향수를 달래주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의 마니아들은 요절한 존 레넌을 비틀즈의 대표주자로 인식한다.
그도 그럴 것이 비틀즈의 레퍼터리는 대부분 ‘레넌-매카트니’ 콤비가 만들었지만 비틀즈의 시작이 레넌이었고, 매카트니를 비틀즈에 끌어들인 장본인도 레넌이며, 록이 가진 저항정신을 가장 투철하게 몸소 실천한 인물이 레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절친’ 에릭 클랩턴에 아내를 빼앗긴 기구한 운명의 조지 해리슨의 기타실력도 비틀즈의 그늘에 상대적으로 가려졌으며 링고 스타가 비틀즈의 완성에 방점을 찍은 중요한 사실 역시 간과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레넌과 해리슨이 떠나고 스타가 잠잠한 요즘 누가 뭐래도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여운이고 향수고 추억이며 현신이다.
그리고 아직도 비틀즈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함이 불변이고 그건 이번 매카트니의 내한공연이 입증해줬다.
만약 매카트니의 이번 내한공연을 안 본 가수나 음악 관계자 중 자신이 뮤지션이라고 떠벌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직무유기를 범했다. 안 보고도 아티스트라고 큰소리친다면 진짜 사기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news@fashionmk.co.kr / 사진=폴 매카트니 트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