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뢰한’, 무례한 세상을 향한 아픈 사랑의 무한신뢰[시네프리뷰]
- 입력 2015. 05.14. 10:25:44
-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오승욱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자 지금까지의 유일한 연출작인 ‘킬리만자로’는 21세기를 여는 2000년의 희망찬 시점에 공개됐지만 내용은 반대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희망을 바라는 절망을 그렸다. 작품성부터 박신양 안성기 정은표의 뛰어난 연기력까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오 감독의 데뷔작답지 않은 진지하고 무거우며 탄탄한 완성도로 누아르 팬들을 열광시킨 바 있다.
그런 오 감독이 무려 15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연출작 ‘무뢰한’은 ‘킬리만자로’에 비해 더 세련됐지만 오 감독 특유의 ‘날것’의 향기는 여전히 비릿하며 ‘킬리만자로’의 남자들의 냄새를 가져오는 가운데 남녀 주인공의 사랑 얘기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보기 드문 하드보일드 멜로를 창조해냈다. 이 영화, 한국영화의 수준을 최소한 한 단계 이상 끌어올렸다. 칸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에 주목한 것은 한국이 배경이지만 그 화법은 다분히 유럽적인 이유다.
서울 용산경찰서 강력계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아내와 이혼한 뒤 혼자 살지만 아직도 아내와 빈번하게 연락하는 ‘고독과 악수’하며 사는 남자다. 동료들 사이에서 지독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잘 해결하는 끈기와 돌파력의 사나이로 유명한 그는 한 폭력배를 칼로 찔러 죽인 또 다른 폭력배 박준길(박성웅)을 잡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런 준길에게 퇴직한 대선배 사업가의 전화가 걸려온다. 선배가 뒤를 봐주는 조폭두목의 부탁이 있기 때문. 그 투자관리 회사의 수뇌부는 조폭인데 두목인 이 사장의 여자였던 김혜경(전도연)이 준길과 눈이 맞아 이 사장에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에 언젠간 준길이 이 사장에게 칼을 겨눌 것이 빤하므로 검거과정에서 다리에 총알 한 방 박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 사장이 준길의 전처의 통장으로 입금한 돈은 고작 48만 원. 준길은 이 사장의 심복 민영기(김민재)를 찾아가 48만 원을 돌려준 뒤 ‘까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는 돈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범인을 잡는 게 더 좋다. 그건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이 아니라 그냥 그의 분노의 표출이자 숨을 쉬는 이유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는 영기의 제보로 혜경의 집을 알아내고 그곳에 도청기를 숨겨놓은 뒤 드디어 나타난 준길과 맞닥뜨리지만 완력에서 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혜경과 밀착하는 잠입수사다. 그는 혜경이 일하는 성남의 허름한 단란주점 마카오의 영업부장 이영준으로 위장해 그녀의 곁을 맴돈다.
혜경은 한때 잘 나가던 ‘텐프로 룸살롱’의 아가씨였지만 번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다 날리고 새끼마담으로 일하다가 손님들의 외상값을 그대로 빚으로 떠안은 뒤 마카오까지 흘러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준길이 마카오에서 혜경을 담보로 선불을 받아가 도피자금으로 쓰고 있어서 빚더미에 앉은 상황. 그녀의 희망이라면 준길과 한국의 수사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 조용히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영준이란 남자가 심상치 않다. 첫 만남에서 반말을 해대며 시건방진 모습을 보이더니 우연히 해장국집에서 소주 한잔 함께 나눌 땐 존댓말로 친절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남자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거짓이다. 그래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지만 다시 만난 준길에게서 영준이 준길의 감방 동료였다는 것을 확인한 뒤 ‘무장’을 해제한다.
재곤은 혜경에게서 색다른 애틋함을 느낀다. 거칠게 밑바닥 인생을 살았고, 살고 있는 그녀지만 영혼의 방랑자같으면서 낭만의 집시같고, 전형적인 술집여자같으면서도 강렬한 순정이 읽혀지는 내면에 빠져든다. 진한 페이소스로 시작된 그녀를 향한 감정이 자신의 인생관과 정서를 뒤흔든 순수한 사랑으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준길이 원하는 돈 내가 줄 테니 그 돈으로 도망가라 하고 너는 나랑 살자’고.
혜경의 준길을 향한 사랑은 단순히 맹목적인 애정은 아니었다. 살벌하고 믿음이 없으며 그래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이 세상에서 ‘사람 둘 이상 모이면 믿으면 안 된다’는 철칙을 지닌 준길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 그녀로선 준길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애정 이상의 의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준이라는 이 남자, 사기꾼인 줄 알았더니 진솔하고, 건달인 줄 알았더니 의리와 순수성이 강하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 강해서 믿음직하지만 부드러움이 없어서 삭막했던 준길과는 다르다. 그래서 혜경은 흔들리면서 영준에게 ‘진짜 나랑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영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 말 속엔 공허하고 슬프고 아픈 감정이 짙게 배어있다.
박성웅의 악역 연기야 이미 ‘신세계’와 ‘살인의뢰’를 통해 충분히 입증됐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칸의 여왕’ 전도연 역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무아지경의 연기를 펼치는데 이번 김혜경으로의 몰입과 소화력은 단연 압권이다. 언론시사회 뒤 그녀는 ‘오늘 처음 봤는데 울 뻔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출력에 대한 찬사이자 자신의 연기에 대한 대만족의 우회적 표현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배우는 김남길이다. 2013년 KBS2 드라마 ‘상어’에서도 재곤과 비슷한, 상처입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만 하더라도 상대배우 손예진에게 심하게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던 그는 이번엔 확 달라졌다. 그건 김남길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가장 큰 이유지만 그를 이끈 선배 배우 전도연의 리더십과 그런 모든 요소들을 잘 뭉뚱그려 ‘작품’ 하나 제대로 찍은 감독의 능력이다.
이 영화는 ‘상처 위의 상처’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건 시작하는 재곤과 혜경의 현재가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두 사람의 위험한 사랑 역시 더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란 암시다. 다만 그 상처의 정도가 얼마나 심할지가 관건이다.
감독은 인트로에서 재곤의 사건현장 출동 원샷을 부감으로 잡아 롱테이크로 이어간다. 그리고 중간 이후 갈등하고 고뇌하며 그게 또 다른 상처로 남는 재곤의 원샷을 앙각으로 잡는데 나중엔 핸드헬드도 사용한다. 그건 경찰과 범죄자의 여인을 사랑하는 또 다른 범죄자, 그리고 사랑에 상처입어 냉혈한이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들이 천하의 천박한 창녀라고 부르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순정파 남자로 변했을 때의 각기 다른 재곤의 심리다. 다만 자극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세련된 느림의 미학으로 진행되는 절반의 앞부분이 다소 지루한 게 옥에 티다.
포인트: 재곤이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 손가락에 튄 소변 한 방울을 유심히 바라본다. 영화 내내 욕 한마디 없었던 재곤이 마지막 장면에서 혜경에게 욕을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세상을 더럽게 살고 싶은 이는 없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오염이다. 청소년관람불가. 27일 개봉.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사진=CGV아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