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스파이’, ‘미생’과 ‘킹스맨’이 보인다
- 입력 2015. 05.27. 09:06:13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현재 극장가는 확실하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스파이’의 양강구도다. ‘매드 맥스’는 지난 22~25일 95만4668명(스크린수 730개, 상영횟수 1만2742회)의 관객을 동원하며 212만1650명의 누적관객수를 기록했다.
영화사상 그 규모와 강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땀 냄새가 물씬 진동하는 ‘매드 맥스’와의 정면대결은 애초부터 무리다. 그럼에도 ‘스파이’는 꽤 선전 중이다. 같은 스파이 물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성공의 후광이자 사회적 현상이 배경이다.
‘킹스맨’은 영국에 본부가 있는 국제 비밀정보기구 킹스맨 조직에서도 가장 전설적인 요원 해리 하트(콜린 퍼스)와 그의 동료의 아들 에그시(태런 애거튼)가 주인공이다. 하트는 작전 중 자신의 부주의로 에그시의 아버지를 잃은 뒤 어린 에그시에게 도움이 필요할 땐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준다.
에그시는 높은 IQ에 주니어 체조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할 정도로 탁월한 유전자를 지녔지만 학교를 중퇴하고 입대한 해병대마저도 쫓겨난다. 취직은 아예 포기한 채 동네 패싸움이 일상인 전형적인 양아치 루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사망 후 낙담한 엄마는 동네 건달 두목과 재혼했고 그 건달은 알코올중독에 가정폭력이 일상이다. 그 속에서 착하게 정상적으로 성장한다는 게 이상할 정도.
그런 에그시가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갈 처지가 되자 하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의 숨겨진 재능을 알아본 하트는 경찰서에서 빼낸 뒤 킹스맨 ‘면접’ 시험을 보게 한다.
2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1부에서 활약한 하트가 절대악 발렌타인(새뮤얼 L. 잭슨)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2부에서 이에 맞서 맹공을 펼치는 에그시의 성장을 보여준다.
앞부분에서 하트가 에그시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야단치자 에그시는 ‘요즘 취직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라고 항변한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명대사다.
‘스파이’는 내부자의 배신으로 비밀요원들의 정체가 악당조직에 드러나는 위기를 맞은 영국 비밀첩보 조직이 뚱뚱하고 미모도 없으며 현장과는 거리가 먼 내근직 여직원 수전 쿠퍼(멜리사 매커시)를 핵무기과 관련된 중대한 사건 현장에 스파이로 투입하면서 벌어지는 얘기가 기둥줄거리다.
섹시 스타 주드 로와 액션 스타 제이슨 스태덤이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얍삽하거나 어리바리한 ‘허당’ 캐릭터로 완전히 변신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지만 역시 영화의 재미의 핵은 멜리사 매커시고 그 다음은 그녀와 얽히고설킨 조연 여배우들이다.
내근으로 근무하며 스트레스를 받던 쿠퍼는 이렇게 외치며 자신의 직업을 한탄한다. “교사로 일하는 게 지겨워 비밀요원이 되면 뭐 좀 화끈할까 싶어서 들어왔더니 박쥐가 난무하는 칙칙한 지하 사무실에서 이러고 있으니 미치겠다”고.
기존의 스파이 영화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교과서였다. ‘수트빨’ 좋은 잘 생기고 섹시한 남자 주인공이 여러 명의 적을 어렵지 않게 때려눕히는 액션을 펼치는가 하면 머리까지 좋아 각종 첨단과학의 지식과 잡다한 상식까지 갖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일 정도로 똑똑함으로 무장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킹스맨’은 어쩐지 중국의 무협지같다. 킹스맨의 수장이 에그시를 추천한 하트에게 ‘천민신분’을 딴죽 걸 듯이 무협지 속 주인공들은 모두 ‘루저’의 출신성분을 딛고 강호의 제왕이 된다. 에그시가 바로 그런 무림의 슈퍼스타와 다름없다.
‘스파이’도 맥락이 비슷하다. 평소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보지 않던 ‘왕 루저’ 쿠퍼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잡게 돼 뭐든 하는 족족 사고를 치지만 결과적으론 그게 일류 요원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활약이 되고 윗선에서 지시한 목표에 다가간다. 그게 바로 ‘킹스맨’의 에그시의 성장과정이고, 무협지 속 주인공의 무공훈련과 무림의 장악 과정이다.
‘킹스맨’이 잔인한 장면에 심각함이 주무기라면 ‘스파이’는 오로지 코미디다. 물론 ‘킹스맨’이 평소 빈틈없던 하트가 잠입한 교회에서 발렌타인의 계략에 의해 분노조절 기능을 잃고 자신이 동성애자고 애인은 유태인과 흑인이며 낙태수술도 찬성한다는 식의 욕을 쏟아내는 장면을 삽입해 보수적이고 편파적인 종교를 비웃는 하이 퀄리티의 블랙코미디를 펼칠 정도로 지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풍자도 있다.
더불어 유럽의 공주가 에그시에게 ‘세상을 구하고 오면 특별한 성관계를 해주겠다’고 하는 장면 역시 보수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
그렇지만 ‘스파이’는 아주 직설적인 화법으로 코미디를 구사한다. 때론 고전적인 슬랩스틱도 마다하지 않아 매우 편하고 자연스럽다. 별다른 사고를 요구하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공감의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게 강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생각과 억지웃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쿠퍼와 그녀의 파트너로 일하는 그녀와 비슷한 ‘루저’ 여자 동료, 그리고 어딘지 악의 축치곤 많이 모자란 악당 여두목까지 나름대로 풍자와 해학과 사회비판을 살짝 담고 있지만 그건 몰라도 되고 굳이 알고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냥 스크린과 대사 자체만 즐기면 끝이다.
그건 작금의 국내 경제가 부자들이 좋아할 만한 환경일 뿐 서민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구조로 형성돼있기 때문이다. 치솟는 전세금에 서민들은 울상인데 부자들은 집값의 상승까지 겹쳐 입 꼬리가 올라간다. 백수오 파동으로 모 코스닥 회사의 주가가 10분의 1로 폭락해도 부자들과는 상관없다. 개미들의 허리만 꺾일 따름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민들에게 1만 원의 위안은 소소하지만 최고의 행복이자 안식이다. 그게 ‘스파이’에 관객이 몰리는 이유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 사진=‘스파이’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