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밀한 유혹’, 흐지부지 로맨스에 빈약한 서스펜스[시네프리뷰]
- 입력 2015. 05.29. 14:16:53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완전범죄 소설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지푸라기 여자’는 프랑스의 카트린 아를레가 고작 20살의 나이에 쓴 것이라 놀랍고, 새드엔딩이라 불편하며, 그래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가운데 드라마와 영화로 옮겨졌는가 하면 살짝살짝 인용되기도 했다.
임수정 유연석 주연의 영화 ‘은밀한 유혹’은 바로 그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지만 과연 소설의 이름값을 제대로 할지는 미지수다.
왜냐면 이런 반전 스릴러 물의 경우 원작이 이미 널리 알려졌기에 새롭고 놀라운 변주가 필요한데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범주에서 마무리될 뿐만 아니라 원작과 워낙 비슷한 설정이라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2년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무르익은 매력을 뽐냈던 임수정은 이제 ‘동안’이란 대명사가 빛바랠 정도로 제 나이를 찾았으며, 유연석은 아직은 스크린의 주연배우라 할 아우라를 뿜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조연인 김 회장 역의 이경영의 시체연기만 돋보일 따름이다.
다만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 지연(임수정)의 캐릭터는 원작인 ‘지푸라기 여자’를 아주 잘 표현한다. 마카오에서 가이드로 일하던 지연은 친구와 자그마한 여행사를 차리고 도약을 꿈꾸지만 친구가 그녀의 이름으로 사채까지 얻어 잠적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폭력조직’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바의 ‘서빙녀’로 전락한다.
그런 그녀에게 동료가 한 광고 전단지를 보여주며 ‘은밀한 유혹’을 한다. 광고는 마카오 카지노의 절반을 갖고 있는 한국계 억만장자 김 회장의 간병인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연은 김 회장의 비서라는 성열(유연석)을 만나는데 성열은 정말 ‘은밀한 유혹’을 제안한다. 자신은 김 회장이 원나잇스탠딩으로 뜻하지 않게 갖게 된 유일한 자식이지만 제대로 아들 대우를 못 받고 있으며 김 회장이 자신에겐 10%의 유산만 남기고 90%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해놓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지연이 김 회장을 유혹해 결혼하도록 자신이 도울 테니 성공하면 그녀가 물려받을 전 재산의 절반씩 나눠 갖자는 제안이었다.
김 회장은 혈혈단신으로 마카오에 와 광대로 일하는 밑바닥 인생을 거쳐 자수성가한 엄청난 재벌이다. 그는 아마추어치곤 썩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연주회를 열다 아내와 자식을 교통사고로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피아노에서 손을 뗀 뒤 괴팍하고 고약한 성질만 부리는 노인이 됐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 생활해야 하는 그는 땅을 밟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거부한 채 오로지 자신의 대형 호화요트 안에서만 사는 폐쇄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게다가 그는 굉장히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위압적이어서 뭐든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피고용인들을 짐승 다루듯 부려먹는 악덕 고용주다.
그런 김 회장에게 지연은 굉장히 이례적인 피고용인이다. 그녀는 김 회장의 명령엔 아랑곳하지 않고 정석과 매뉴얼대로 행동한다. 그런 그녀에게 김 회장은 거액의 보너스나 엄청난 보석을 제안하며 자신의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지만 그녀는 코웃음 치듯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한다.
이 모든 것은 김 회장의 성격과 취향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한 성열의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맞아떨어져 김 회장이 지연에게 프러포즈하고, 이면에서 성열과 지연의 야릇한 로맨스도 무르익어간다.
하지만 이들의 ‘작전’은 첫날밤이 지난 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김 회장이 간밤에 질식사한 것. 성열은 김 회장이 유언장을 바꾸긴 했지만 아직 공증을 받지 않았으니 어떡하든 하루만 김 회장의 죽음을 숨기라고 지연에게 부탁하고 그 시간 동안 공증을 받겠다고 떠난다.
요트가 부산항에 도착한 뒤 지연은 간신히 김 회장의 죽음을 숨긴 채 그의 저택 안방에 들어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성열이 얘기한 주치의가 드디어 도착한 듯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지연의 행동을 의심한 김 회장의 매니저 혜진(진경)의 신고로 출동한 형사다.
지연은 김 회장 살해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되고 언론은 지연을 신데렐라에서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된 여자로 대서특필한다.
이렇게 영화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지연이 지푸라기가 아닌 금동앗줄을 잡는 듯했지만 알고 보니 그게 썩은 지푸라기였음을 잘 표현한다.
시작은 원작에 비해 결코 힘이 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몇 가지 디테일을 추가하거나 살짝 비틀어 나름의 반전과 엔딩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은 엿보이지만 문제는 원작자보다 나은 게 없는 기술이었다.
로맨스와 스릴러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드는 초중반의 전개는 나름대로 봐줄 만하지만 후반부의 어이없는 액션과 예측 가능한 결말은 원작을 안 읽은 관객까지도 별로 놀라게 만들 ‘한방’이 부족해 보인다.
감독은 세 명의 주인공 외에도 혜진 유미(도희) 선장(박철민) 파키스탄인 하인 등 4명의 ‘다크 호스’를 삽입해 차별화를 꾀하지만 감독의 의도만큼 작품을 빛내는 역할로 와 닿지 않는다. 특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 박철민과 진경의 존재감을 이토록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연출의 구도는 아쉽다.
원작소설은 제목처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심판이 아닌 관조적 시선에서 소름 돋게 그려냈지만 ‘은밀한 유혹’은 캐치프레이즈처럼 신데렐라에 중점을 뒀다. 평범하지만 열심히 살려던 한 젊은 여자가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져 더러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팔면서도 한편으론 진정한 사랑을 꿈꾸다 결국 두 가지 모두 갖지는 못하면서도 신데렐라가 동화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듯하지만 그게 굉장히 영화적이어서 관객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만들 순 없을 듯하다.
결국 꽤 진중한 메시지를 주는 것도,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칠 통렬한 반전이 있는 것도, 여성의 감수성을 울릴 로맨스가 있는 것도 아닌 국적불명의 ‘짬뽕비빔밥’같은 영화가 됐다. 굳이 미덕을 찾자면 초반의 마카오의 풍경과 더불어 영화 내내 노출되는 고급 요트의 호화로운 내부다. 그건 바로 지연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부에 대한 애틋한 욕망의 직설적 표헌이고 이 영화의 주제다.
15세 이상 관람 가. 내달 4일 개봉.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 사진=‘은밀한 유혹’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