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모의 테마토크] 아나운서는 왜 연예인이 되나?
- 입력 2015. 06.04. 10:26:08
-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지난달 26일 열린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TV부문 신인 여자 연기상 후보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백지연이다. 비록 트로피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고아성에게 안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 했지만 아나운서-기자-진행자로 언론인의 길을 걸어오다 이제 막 배우로 데뷔한 그녀로서는 첫걸음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룬 셈이다.
아나운서 출신의 늦깎이 연기자로 현재 가장 ‘핫’한 인물은 KBS 아나운서국 소속 서기철이다. 그는 현재 KBS2 금토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예능국장 장인표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는 KBS 박중민 예능국장의 동기인데 그들로부터 오디션을 통과해 데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KBS의 사규에 따라 일반인의 6만 원에도 못 미치는 사원으로서의 2만 원의 출연료를 받을 따름이다. 백지연은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정도 주조연급 비중이면 최소한 수백만 원 대는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기철은 2만 원의 수백 배는 될 법한 기능을 드라마 속에서 해내고 있다. 처음 그의 연기는 어색하게 다가온다. 일정한 톤으로 다소 낮게 차근차근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통통 튀는 드라마 전체의 톤과 잘 안 어울린다. 하지만 두세 번 그의 연기를 접하다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사장과 후배 PD와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연예국장이란 위치를 지키려는 중장년 직장인의 모습을 그는 마치 자기 맞춤옷처럼 연기해낸다.
압권은 톱가수 신디(아이유)의 소속사 변 대표(나영희)와 김태호(박혁권) CP 사이에서의 절묘한 자기관리와 체면치레였다. 신디라는 빅카드를 ‘1박2일’이라는 힘들고 돈 안 되는 프로그램에 투입시키기 위해 변 대표에게 굽실거리면서도 적당하게 체신을 지키려 태호에게 변 대표를 ‘알아서 모실’ 것을 지시하는 장면에서 신인배우의 어설픔은 없고 대신 직장에서 닳고 닳아 처세술에 능통한 ‘능구렁이’만 보일 따름이다. 서기철의 캐릭터 분석과 소화력이 뛰어나단 뜻이다. 그건 그 어느 연기자보다 KBS 사내 분위기를 잘 아는 덕이다.
그는 KBS의 스포츠통이다. 굵직굵직한 스포츠중계를 도맡아 해왔다. 그런데 다 늙어서 왜 연기외도일까?
최근 MBC 아나운서 출신 문지애가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녀는 2년 전 퇴사한 후 현재 오상진과 함께 연예기획사에 적을 두고 있다.
그뿐 아니라 KBS 출신 전현무는 거대기획사 SM C&C에 소속돼 방송사 사원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종횡무진 활약하며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최근엔 CF도 찍었다. 방송사 소속으론 광고를 찍을 수도, 돈 받는 행사의 진행을 맡을 수도 없다.
그 외에도 오영실 최은경 임성민 최송현(이상 KBS 출신) SBS 출신 김성령 등이 연기자로 전업하고 맹활약 중이며 MBC를 떠난 김성주는 한때 극심한 슬럼프를 겪긴 했지만 이젠 ‘친정’을 중심으로 ‘친정’의 동료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개런티를 받고 활동 중이다.
아나운서는 아니지만 기상캐스터 출신의 김혜은 박은지 안혜경 등도 연기자로 활동 중이다.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는 하는 일도, 방송사 내 지위도 다르지만 시청자의 눈엔 비슷하단 점에서 그들의 연기자 변신은 결국 ‘인기’와 ‘수입’으로 귀결되긴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현재 방송사에 적을 둔 아나운서 중 다수가 수시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연예인의 지위를 노린다. SBS 김일중, KBS 조우종이 대표적이다.
아나운서는 기자 PD와 함께 방송사 직원의 3대 꽃이다. 굳이 따지자면 아나운서는 PD와는 멀고 기자와는 가깝다. 기자들의 리포트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역할과 더불어 MBC ‘명랑운동회’의 변웅전 아나운서처럼 오락과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는다는 점에선 기자와 연예인의 중간쯤 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아나운서는 그 양다리 사이에서 기자의 언론인에 가까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예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연예인의 위상과 수익이 대폭 상승하면서 명예보단 실리가 우선인 사회적 분위가 조성됨에 따라 아나운서 역시 언론인이란 명예보단 큰 수익과 더불어 인기라는 명예가 주어지는 연예인을 선호하게 된 것.
‘프로듀사’엔 어느 정도 그 답이 숨겨져 있다. ‘뮤직뱅크’ PD 탁예진(공효진)은 작가나 후배들 앞에서 신곡의 컨셉트 때문이라며 야한 의상을 고집하는 신디를 한바탕 혼낼 것처럼 과장된 액션을 취하다 막상 신디의 기에 눌리자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뒤 신디에게 바짝 고개를 숙이고 부탁을 한다.
신입 PD 백승찬은 원로배우 윤여정이나 변 대표를 대할 땐 고양이 앞의 쥐다. ‘1박2일’의 라준모(차태현)는 기존에 어렵게 섭외해 출연시키고 있던 여배우들을 모두 하차시켜야 하는 자리에서 미안해 몸 둘 바를 모른다.
지상파 방송사의 예능국 PD라면 사실 연예계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마음가짐 하나에 연예인이 스타가 되거나 무명으로 스러지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을 기점으로 연예기획사가 대형화되고 스타의 위상이 급상승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작은 기획사야 아직도 방송사 PD를 ‘하늘’처럼 모시지만 대형기획사는 최소한 동등한 위치에서 PD들과 자사 연예인의 캐릭터와 무대를 논의한다. 사실상 대형기획사의 스타는 일방적 ‘갑’이다. 그래서 그 회사의 신인도 제대로 대우를 받으며 방송에 데뷔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니 아나운서가 아나운서란 직업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평생직장이란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일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다수의 아나운서들은 자격이나 자질만 된다면, 그리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하시라도 튀어나가 대형기획사에 적을 두고 연기도 하고 진행도 하며 노래도 부르고 싶다.
지난달 말 원빈과 이나영의 비밀결혼식이 강원도 정선의 시골마을에서 열렸다. 그 사진을 접한 누리꾼 중 상당수는 ‘영화 스틸이 따로 없다’고 두 눈에서 하트가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연예인이 신격화된 사회이니 아나운서가 연예인을 선망할 수밖에 없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 사진=KBS SBS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