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절친 악당들’, 자본가를 향한 통쾌한 칼춤[시네프리뷰]
- 입력 2015. 06.17. 14:56:20
-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임상수 감독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좋다와 불편하다의 딱 이분법적 구조로 나뉜다. ‘눈물’(2000)은 비록 흥행에 참패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찬사 일색이었다. 호불호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조금 성적이 좋은 ‘바람난 가족’(2003)은 일부 호평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아이를 죽이는 장면 하나로 내내 욕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감독은 ‘오래된 정원’(2007)부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논리정연하게 잘 푸는 세련된 얘기꾼이 돼갔다.
‘오래된 정원’은 멜로의 틀을 빌어 1970~80년대 독재정권에 대항하다 희생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는 정치적인 색깔이 확연한 작품이고, 그 스토리는 ‘하녀’에서 마치 연작처럼 이어지며 이번엔 그런 독재에 빌붙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을 재산가들을 조롱하면서도 결국 서민은 그들을 이길 수 없다며 ‘오래된 정원’처럼 하녀의 자살로 결론 내린다.
그리고 후속작 ‘돈의 맛’에선 아예 드러내놓고 ‘하녀’에 출연했던 나미를 성장시켜 돈의 맛이 달콤하지만 자본가나 맛볼 수 있지, 서민에겐 그림의 떡이란, 역시 ‘하녀’의 연장선상에서 속편 같은 구도와 주제를 펼친다.
감독의 신작 ‘나의 절친 악당들’은 속편이나 연작의 장치는 없지만 연장선상에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지난 3편의 영화 속 소재와 주제 혹은 등장인물들을 그러모아 이 한 편에 집합시켰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들여놓으니 여유 공간이 없는 자취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비정규직 공무원으로의 취업에 성공해 곧 정규직이 되는 지누(류승범)는 상사 인수(김응수)의 지시에 의해 한 SUV 차량의 뒤를 쫓는다. 그 차에는 회장(김주혁)이 자신의 뒤를 봐주는 ‘높은 사람’에게 전달할 거액의 현금이 담긴 트렁크 3개가 들어있는데 그만 사거리에서 큰 충돌사고를 당한다.
급하게 현장에 출동한 견인차 운전수 나미(고준희)는 견인하던 중 차 안에서 트렁크를 발견하곤 자신이 일하는 서비스센터로 끌고 온 뒤 동료인 가나 출신 불법체류노동자 야쿠부(샘 오취리)와 함께 나누려다 그만 지누에게 들킨다.
사고 당시 지누는 나미를 발견하곤 왠지 그녀에게 이끌려 끝까지 따라왔다 이런 횡재를 나누게 된 것. 셋은 트렁크를 하나씩 나눠 갖는다.
한국 여자 정숙(류현경)과 결혼해 딸까지 둔 야쿠부는 잽싸게 가나로 환국하려 하지만 CCTC를 확보해 야쿠부가 단독범인이라고 결론내린 인수와 회장의 오른팔인 이사 상호(정원중)가 출국금지 조치를 취해 놓은 탓에 정숙과 딸만 보내고 홀로 남게 된다.
첫날 잠자리를 함께 한 지누와 나미는 돈을 쓰는 재미에 몰두하지만 야쿠부는 금세 인수와 상호 패거리에 잡힌다. 인수는 야쿠부가 자백한 은닉처에서 트렁크가 하나만 나오자 나머지 두 개가 나미에게 있음을 직감한다.
이 모든 사실을 인수의 밑에서 지켜본 지누는 나미에게 탈출할 것을 전달하지만 정작 덜미를 잡힌 사람은 그다.
인수 일행은 지누를 심하게 고문한 끝에 그 영상을 담아 나미에게 보내고, 나미는 어느새 지누를 사랑하게 된 정과 돈에 대한 욕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영화는 앞부분 상당 시간이 재미없고, 지루하며, 산만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지누가 왜 스토커처럼 낮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숨어서 나미를 졸졸 쫓아다녔는지 설명이 부족하고, 그런 전개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등장부터 달랑 팬티 하나 걸친 채 몸매자랑을 하는 고준희는 남성 팬들에겐 ‘눈의 호강’일지 몰라도 역시 당위성이 부족한 장삿속만 드러낼 따름이고 지누와 나미의 만난 지 몇 시간만의 베드신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그래서 영화는 중간까지 불편하고 나른하다. 특히 류승범의 캐릭터 소화는 마치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국경살쾡이처럼 과장돼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게다가 이렇게 섹시한 여자 견인차 운전수는 비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불만은 중반 이후 모두 해소된다. 참을성 있는 관객은 후반 50분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지누는 아직도 수천만 원의 빚이 있는 전형적인 ‘5포세대’ 젊은이의 초상이고, 나미 역시 결손가정 혹은 가난한 다수의 서민 가정이 낳은 시대적 비련의 표상이다. 그녀가 쓰러져가는 무허가 건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왔다는 게 그 증거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떴으며 몇 년 전 아버지마저 분신자살했다는 대사가 그 배경이다.
회장은 멀쩡한 외모에 화려한 수트 핏을 자랑하며 값비싼 그림들이 걸린 호사스러운 거실에서 고급 와인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태반은 욕이고 반말이다.
그런 회장의 ‘개’인 상호와 공무원의 지위를 망각한 채 자본 앞에 무릎 꿇은 인수는 돈을 위해서라면 자본가의 발바닥을 핥는 것쯤은 숨 쉬는 것만큼 쉬우며 충성을 위해 아랫사람을 노예 부리듯 하는 것 역시 손가락 구부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천박한 현실을 조롱하는 장치로 쓰인다.
임상수 영화의 화법대로 이 영화에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앞세워 ‘피식’ 하는 웃음은 있지만 박장대소를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지누와 나미의 멜로는 정서적 교감보단 소모적 섹스가 앞장서는 탓에 낭만 역시 별로 안 보인다.
하지만 돈도 없고 외모도 사뭇 다른 야쿠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난 그를 절대 배신할 수 없어”라고 절박하게 외치는 정숙의 대사에서 감독은 혼돈의 이 시대에서 그래도 다수의 ‘평민’들이 지켜야 할 것이 뭔가를 웅변함으로써 영화의 품격을 높인다.
감독의 결론은 전작처럼 한결같다는 게 우울하다. 회장은 자신을 찾아온 지누와 나미 앞에서 그들이 가진 돈이 자신에게는 그다지 의미 있는 액수가 아니라고 건방을 떤 뒤 한술 더 떠 “어차피 얼마 뒤엔 그 돈이 다 소진될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아냥댄다.
전작들에서 감독은 ‘부자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세습’이라고 강변한 바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이렇게 씁쓸한 영화지만 그래도 후반부의 놀랄 만한 결론이 통쾌한 카타르시스와 통렬한 유머를 던져주니 ‘쥬라기 월드’보단 낫다. 그런데 이 영화 어쩐지 ‘이지 라이더’와 ‘델마와 루이스’의 향기가 살짝 풍긴다. 수트 한 벌이 의상의 전부지만 더욱 멋있는 '오빠'로 무르익은 류승범의 매력이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이저라면 웬만큼 성장한 연기와 충만한 매력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준희는 메인디쉬다. 청소년 관람불가. 25일 개봉.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 사진=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