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수의견’, 소시민을 위무하는 한국영화의 울분 [시네프리뷰]
- 입력 2015. 06.19. 09:06:25
-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김성제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의 프로듀서를 거쳐 ‘혈의 누’의 각본과 프로듀서를 맡은 뒤 드디어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소수의견’으로 첫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무겁게 펼쳐진다. 서울 변두리 한 강제철거,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철거지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용역깡패와 경찰로 구성된 ‘공권력’에 맞서고 이 과정에서 20살 전투경찰과 16살 철거민의 아들이 죽는다.
경찰은 서둘러 소년의 범인으로 용역깡패 한 명을 지목해 체포하고 용의자는 살인 혐의를 순순히 시인한다.
지방대학교 출신의 2년차 국선변호사 윤진원(윤계상)은 말이 변호사지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약자다. 그는 철거 현장에서 아들을 잃은 뒤 전경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박재호(이경영)의 변론을 맡게 된다. 그런데 구치소에서 만난 박재호는 아들을 죽인 건 철거깡패가 아니라 경찰이라며 정당방위에 의한 무죄를 주장한다.
이 사건을 맡은 초기만 해도 떨떠름한 마음에 그냥 대충 형식적으로 처리할 요량이었던 진원은 사건을 파헤쳐갈수록 피어오르는 강한 의혹에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경찰 기록은 열람이 완벽하게 차단됐으며 검찰은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하려는 듯하다.
그러던 중 열혈 신문기자 수경(김옥빈)이 접근해 그 사건에 뭔가 무소불위의 힘에 의해 가려진 진실이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진원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님을 직감하고 선배인 이혼전문 변호사 대석(유해진)에게 사건을 함께 파헤칠 것을 제안한다.
세 사람은 경찰 작전 중에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죽였기에 국가가 이 사건의 최종책임자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국가를 피고로 한 국민 참여재판 및 100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과 힘으로는 감히 깨뜨릴 수 없는 엄청난 배경이 사건의 뒤에 숨어있고 그래서 이들의 정의구현을 향한 의지는 번번이 꺾인다.
이 영화의 촬영이 이미 3년 전에 끝났고, 원래 배급사였던 대기업 CJ E&M에서 충무로 토종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로 옮겨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드디어 개봉을 눈앞에 둔 사연은 이미 충무로에서 수많은 영화인들을 한숨을 자아낸 바 있다.
이 영화는 ‘관객동원 수’ 등의 천박한 자본주의적 계산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한국영화의 다양성 확보와 영화인 혹은 작가의 표현의 자유와 관객의 다양성을 즐길 권리에 대한 성지순례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존 영화와는 좀 다르게 평가돼야 할 것이다.
영화의 주제와 소재는 무섭다.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또 먹먹하고 분통이 터질 법도 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 무거움을 주무기로 관객에게 자신의 연출철학을 강요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영화의 대사에는 블랙코미디적 위트와 풍자가 가득 담겨져 있는데 관객이 이걸 심각하지 않게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연출실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별다른 이데올로기 없이도 법정영화 특유의 긴장감을 내내 즐길 수 있다는 미덕도 충분하다.
새파란 국선변호사 주제에 감히 스펙과 인맥이 눈부신 고등검찰 간부를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 대결을 펼치는 이 구도는 어차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지만 감독은 승패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대결해봐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변인지 된장인지는 꼭 먹어보지 않아도 안다는 모순같은 얘기를 한 작품 안에 모두 담고 있다.
수경은 ‘기레기’가 판치는 언론계에서 진정한 기자정신에 입각한 언론인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녀의 과한 정의감은 재호와 진원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변함없이 확고하다. 그녀는 진원에게 “기자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순간 기사를 쓸 수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어쩌면 그 코멘트는 감독이 대한민국의 언론을 향해 던지는 통쾌한 쓴소리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일찍이 ‘꿈의 공장’으로 불렸다. 그 의미는 대중이 이룰 수 없는 꿈을 2시간동안이나마 대리만족할 수 있게끔 그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생산지란 의미다. 하지만 영화란 게 그렇게 간단한 유희나 오락용 콘텐츠에 그친다면 그토록 예술로 추앙받을 의미가 없다.
배우가 캐릭터 속에 혼을 불어넣는다면 감독은 배우를 비롯한 스크린 속 각종 장치와 대사 등을 통해 자신의 작가주의 정신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영화는 오락용인 것도 있지만 심오한 메시지나 작가주의적 철학 혹은 이데올로기가 들어간 미디어적 성격의 것도 있다.
왜냐면 대중의 취향은 다양하고 그래서 그들 각자에겐 선택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다양성의 확보로 가능한 한 일일이 그들의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것 역시 영화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분명히 호와 오로 확연하게 나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얘기하는 것은 왼쪽이냐, 오른쪽이냐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당연한 권리다. 단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서민이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인정하고 만다. 고등검찰 간부에서 대형 로펌 변호사로 변신한 악의 축 홍재덕(김의성)은 진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운영되려면 희생과 봉사가 뒤따라야 하는 거다. 그래서 박재호가 희생된 것이고 나는 봉사했을 따름이야.”
이건 궤변이고 아전인수다. 국가를 위한 희생이나 봉사는 소수의 권력자나 기득권층을 향할 게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인 전 국민을 향해야 한다.
영화가 끝을 향해 달릴 무렵 감독은 어지러운 철거현장을 오블리크 앵글로 뒤틀리게 잡는다. 온전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직설화법이다. 그리고 법정의 최종 선고 뒤 사라지는 판사들을 감독은 블랙아웃으로 커트를 잘게 나눴다. 그건 혼돈이다. 영국 출신의 전설적 프로그레시브록 그룹 킹 크림슨의 불멸의 히트곡 ‘Epitaph’ 중 ‘Confusion will be my epitaph’(혼돈이 내 묘비명이 될 것)이란 가사가 생각나는 영화다. 127분의 러닝타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15살 이상 관람 가. 오는 24일 개봉.
PS; ‘개그콘서트’에서 오래 전 ‘개그는 개그일 뿐’이란 대사를 웅변했듯 영화는 영화로만 보여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래서 이런 심각한 영화가 화제가 되고 논란의 중심에 서는 현실은 안타까운 아이러니다. 이런 영화가 나와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굳이 만들어질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블리크 앵글이 아닌 평범한 풀샷이 아닐까?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 사진=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