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녀’, 이병헌보다 장예모가 보인다 [시네프리뷰]
- 입력 2015. 08.06. 08:37:07
-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드디어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무협사극 영화 ‘협녀, 칼의 기억’(박흥식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이 5일 언론 및 배급 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이미 찍어놓은 지 한참 됐지만 지난해 배급사는 이병헌이 ‘50억 원 협박녀’ 사건에 연루되는 복병을 만나 개봉을 계속 미룬 끝에 조심스럽게 오는 13일 극장에 내건다.
배경은 칼이 지배하던 고려 말이다. 한 스승(이경영) 밑에서 자란 의협 3인방 덕기(이병헌) 월랑(전도연) 풍천(배수빈) 등은 민심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간신 존복(김태우)을 미끼로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덕기가 사형인 풍천과 연인인 월랑을 배신한다. 이에 분노한 풍천이 덕기를 궁지로 몰자 다급해진 월랑이 풍천을 베고, 덕기는 풍천의 아내를 죽인 뒤 어린 그들의 딸 홍이의 등에 큰 상처를 남긴다.
그로부터 18년이 흘러 덕기는 유백이란 새 이름을 갖고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면서 남다른 야망을 키우는 가운데 정적 존복과 사사건건 대립한다.
월랑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홍이를 키우며 검술을 가르치는 가운데 그녀에게 복수심을 키워줬다. 겉으로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사실 홍이의 부모는 유백과 자신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언젠간 홍이가 그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어느 날 일취월장한 자신의 무공실력에 자아도취한 홍이는 저잣거리로 나갔다가 유백이 주최한 무술대회에서 단연 탁월한 솜씨를 보인 을(준호)과 대적한다. 그녀의 검법을 유심히 살펴보던 유백은 바로 자신들이 스승에게 전수받은 검법은 물론 월랑의 흔적을 읽어내곤 직감적으로 그녀가 홍이임을 알아챈다.
그리고 유백은 부하들에게 홍이를 죽이되 월랑은 생포해오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세 주인공의 얽히고설킨 애정과 원한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릴 줄 모르고 럭비공처럼 천방지축으로 튄다. 여기에 뜬금없이 유백의 심복이 된 을과 홍이의 로맨스가 가미되고 구차하게 유백과 월랑의 예전의 불타던 사랑과 그 여운을 잊지 못한 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복잡한 구도가 보는 이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미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아름다운 수중발레 같은 유려한 검법 대결 장면이 러닝타임 내내 펼쳐지지만 그 힘든 와이어액션의 당위성은 찾기 힘들다.
인트로에서 홍이는 자신의 키보다 2~3배는 크게 훌쩍 자란 해바라기를 가볍게 뛰어넘은 뒤 “드디어 해냈다”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노란 꽃이 흐드러진 노란 해바라기의 바다를 날아다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당위성이나 개연성이 부족한 채 그토록 해맑던 홍이의 캐릭터가 정반대로 변해가는 게 관객을 이해시켜 몰입하도록 만들기 쉽지 않다. 순백의 소녀가 처절한 슬픔마저도 감내해야 할 만큼의 분노를 어디에서 끌어냈는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건 유백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다. 그토록 순수했던 덕기가 야비하고 잔인하며 욕심에 가득 찬 유백이 된 상황은 특별한 설명이 없더라도 여러 가지 정황이 부연설명을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시대건 이 시대건 능력을 갖춘 남자라면 출신성분을 떠나 그런 야망을 품어볼 만하다는 설득력을 보인다. 하지만 극적인 순간에 마음이 변하는 것은 왠지 석연치 않다. 그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그동안의 설명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다.
그나마 인생 내내 ‘협객의 도리’를 일관되게 좇는 월랑의 초지일관은 설득력이 있다. 그녀가 초반에 의외로 풍천을 베는 이유는 나중에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중 가장 심오한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유일한 캐릭터다.
무협물 팬들이 보면 금세 알겠지만 해바라기밭, 대나무숲, 갈대밭 등에서 펼쳐지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와이어액션은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의 숱한 작품이나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클라이맥스의 밀실 신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이 떠오른다.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대의명분도, 의리도, 정의도, 사랑도, 숙명도, 그리고 처절한 운명도 모두 펼쳐놓으려는 욕심이 오히려 작품의 중심을 흔드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무협멜로가 되고 말았다.
장이머우는 ‘영웅: 천하의 시작’에서 진정한 대의명분을, ‘연인’에선 정치와 음모 속의 진정한 사랑을, ‘황후화’에서 역시 그와 비슷한 웅변을 비교적 또박또박 말하면서 화려한 미장센과 미술장치로 관객의 눈을 호화롭게 한 바 있다.
물론 그쪽 제작비와 비교할 순 없지만 80억 원대의 제작비로 사랑얘기를 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수채화 같은 판타지 멜로 ‘인어아가씨’가 나을 뻔했다.
크레딧은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순이지만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의 무게중심을 담고 있는 배우는 김고은이다. 하지만 김고은은 이런 대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게다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준 이병헌이나 ‘칸의 여왕’ 전도연은 웬일인지 ‘내 마음의 풍금’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다.
그건 ‘다나까’ 체의 정형화된 대사 탓도 있겠지만 최종책임자인 감독의 연출과 안 맞은 이유가 클 것이다. ‘와호장룡’은 인간의 천박한 욕망과 이기적인 사랑을 소재로 인간과 신의 경계에 대해 묻는 가운데 얄팍한 동경과 그것을 이겨내는 해탈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주장한다. 그 소재는 천하명검 청명검이고 차다.
‘협녀’에서도 월랑과 유백의 사이에 이 차가 굉장히 중요한 소재 혹은 매개체로 등장하고, 여기에 홍이가 끼면 풍천이 남긴 명검이 또 다른 이중적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정작 박 감독은 리안 만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끝낸다. 15세 이상 관람 가.
사족: 전도연은 궁리나 장쯔이가 아니었다.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사진=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