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기억이 있는 한 배우라는 옷 계속 입고 싶어” [인터뷰]
입력 2016. 05.12. 08:49:46
[시크뉴스 이보라 기자]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멸되셨습니다”라는 제작자의 말이 영화 ‘계춘할망’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윤여정은 이 영화에서 이지적인 이미지를 벗고 계춘 자체가 됐다. 배우로서 도전이었다는 윤여정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 제주도 해녀로 살아가는 계춘의 삶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를 다룬 ‘계춘할망’은 잔잔하면서 따뜻한 분위기의 영화지만 윤여정은 오히려 ‘계춘할망’에서 오히려 육체적으로 고생을 더 많이 했다고. 계춘은 그냥 해녀가 아닌 왕초 해녀다. 왕초 해녀는 바다로 인해 남편을 잃은 동네 과부들을 통솔하고 물질을 가르치는 리더로 그냥 해녀와는 의미가 달랐다. 그런 만큼 계춘에게는 큰 태왁이 주어졌다.

“처음에는 저한테 큰 태왁을 주길래 가벼운 걸로 갖고 오라고 했죠. 그런데 내가 왕초 해녀이기 때문에 큰걸 잡아야한다고 하더라고요. 가짜 해녀가 진짜 해녀인척 하려니 그게 어렵더라고요. 진짜 해녀들은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 바다에 나가기 좋은날 등을 육감으로 다 아는데 배우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힘들었죠. 해녀복도 고무가 굉장히 두꺼웠어요. 해녀들도 같이 입혀주고 벗고 그렇게 협동을 하는 거였어요. 다른 건 참겠는데 목이 너무 조여서 숨을 쉴 수가 없더라고요. 화장실에 갈 때도 두셋이 가야했죠. 의상팀에서 옷을 빨리 벗겨주려다가 귓불이 찢어지기도 했어요.”

계춘의 손녀 혜지 역은 김고은이 맡았다. 김고은이 혜지가 된 데는 윤여정의 덕도 있었다. 윤여정은 제작자에게 눈여겨 본 배우로 천우희와 김고은을 꼽았다고 했다.

“손녀를 누구를 했으면 좋겠냐고 묻기에 내가 캐스팅디렉터도 아닌데 알아서 하시라고 했더니 그럼 눈여겨본 젊은 배우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천우희랑 김고은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천우희는 서른이라 교복을 입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해서 그럼 김고은이 좋겠다고 했죠. 어차피 제 손녀를 입양하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투자자라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웃음)


그렇게 손녀 혜지를 연기하게 된 김고은과 윤여정의 케미는 실제 할머니와 손녀를 보는 듯 했다. 영화에서 계춘이 혜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사람에 대해 절로 생각하게 만든다. 윤여정은 김고은이 처음부터 싹싹하지 않았던 게 오히려 더 좋았다며 김고은과 촬영하던 당시를 떠올렸다.

“걔가 내 덕을 본 게 있어요. 내 고등학교 후배가 집에서 밥, 김치, 밑반찬을 해서 도시락을 싸오니까 걔가 그걸 얻어먹으려면 나한테 붙을 수 밖에 없었죠.(웃음) 우리 후배가 ‘쟤도 잘 먹네’ 그러더라고요. 제가 평론가가 아니니 연기를 평할 건 없고 좋았던 건 초반에 저한테 주춤주춤 다가와야하는 역할이었는데 그게 잘 표현이 된 거예요. 보자마자 훈련된 애들처럼 ‘선생님 사랑합니다’하면서 다가오면 버겁거든요.”

할머니를 연기하면서 분장이 다해줬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읽고 그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 외에 특별히 준비한 게 없었다는 윤여정은 검버섯과 흰머리 등 할머니 분장에 대한 부담이 있지 않았냐고 묻자 자신을 여배우가 아닌 노배우라고 칭하며 그런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내려놓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어요. 저는 여배우 아닌 노배우잖아요. 흉해봤자 뭐 얼마나 흉하겠냐 생각했죠. 그 분장을 하고 거울을 본적이 없었고 모니터도 본적이 없어요. 제가 연기를 하면서 언젠가부터 모니터를 보지 않게 됐어요. 감독이 보여주는 건 연기가 본인 계획대로 됐는지를 보라는 뜻인데 저는 얼굴에 있는 흉터에 눈이 가더라고요. 배우가 그 순간 몰입을 다해도 연기가 될까말까 한데 제가 그런 것까지 연구하면서 연기할 재량은 못돼요.”

‘계춘할망’이 관객의 눈시울을 적실 수 있는 이유에는 윤여정의 디테일한 연기가 있기 때문. 윤여정은 일부러 더 등을 굽게 했고 몸을 더 쪼그렸다. 또 자신이 먹던 숟가락으로 손녀에게 밥을 주는 연기를 하면서 증조할머니를 떠올렸다고.


“우리 증조할머니한테 제가 어릴 때 너무 잘못했어요. 시나리오를 읽는데 증조할머니가 생각나더라고요. 어릴 때는 자신이 먹던 걸 저한테 주는 증조할머니가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근데 그 할머니는 나를 너무 사랑했죠. 이 작품은 나한테 증조할머니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했어요.”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연기를 해오면서 신인의 무서움을 알게 됐다는 윤여정은 연기가 오래한다고 잘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타성에 젖는 걸 경계했다.

“신인을 볼 때 신인이 잘할 때가 제일 무서워요. 아주 신선하고 처음이라는 게 무섭죠. 연기를 오래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몸에 젖어버린 게 있어요. 그런 걸 내가 알아서 고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이 그렇게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배우가 좋은 감독을 만나길 바라는 거고요. 지적해줘서 고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니까요. 오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기술자나 기능공같은 직업과 달리 연기는 오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윤여정은 앞으로도 계속 배우라는 옷을 입고 싶다는 뜻을 특유의 솔직함으로 털어놨다.

“배우라는 옷을 벗기에는 제가 그동안 배우를 한 세월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그동안 배우로만 살아온 탓에 평범하게 살줄 모르는 제가 이일을 못하게 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대사를 외울 수 있는 한은 이 옷을 입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정말로 배우가 됐나보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보라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콘텐츠난다긴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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