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혜옹주’ 나라의 운명을 닮은 그녀의 삶 [씨네리뷰]
- 입력 2016. 08.01. 14:24:52
- [시크뉴스 최정은 기자]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구불구불한 글씨로 남긴 이 말은 코끗을 아릿하게 만든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의 삶. 그녀의 삶은 나라의 운명과 너무도 닮아있다. 일제로부터의 탄압과 그로 인한 그녀의 기구한 삶과 하염없이 귀국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애타게 광복을 기다리는 국민의 모습과 겹쳐진다.
덕혜옹주가 일제에 순응하며 편안한 삶을 누리는 대신 자신의 위치와 본분을 잃지 않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컸다. 마침내 해방이 됐을 때 그토록 바라던 입국을 거부당하고 일본에 머물러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의 운명은 해방 후에도 정의가 온전히 바로서지 못했던 불운했던 나라의 운명과 같았다.
일본에 끌려가 평생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최초로 다룬 영화 ‘덕혜옹주’가 오는 3일 개봉한다. 지난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입봉해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휩쓴 허진호 감독은 이후에도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등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미세한 감성을 놓치지 않고 표현해왔기에 섬세한 연출을 하는 감성 대표 감독이라 할만하다. 특히 지난 2005년 ‘외출’에서 손예진과 한 차례 만난 바 있어 두 번째 호흡이 더 기대를 모은다.
고종황제(백윤식)의 외동딸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사랑을 받은 덕혜옹주(손예진). 일제는 만 13세의 어린 덕혜옹주를 강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매일같이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던 덕혜옹주 앞에 어린 시절 친구로 지낸 장한(박해일)이 나타나고 영친왕 망명 작전에 휘말리고 마는데… 덕혜옹주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허 감독은 영화 전반에서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다. 감성을 섬세하게 다루는 감독답게 러닝타임 내내 인물의 감정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으나 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소설과 차이를 뒀다. 소설엔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 조선 독립군들이 시도했던 영친왕 망명 시도를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보다 집중적으로 다뤄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울림이 있는 음악과 감성을 자극하는 섬세한 영상이 한데 섞이면서 관객에게 벅차오르는 경험을 선사한다.
연출과 음악, 카메라 앵글이 하나를 이뤘다면 여기에 방점을 찍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손예진은 첫 등장부터 이미 깊은 감성을 품은 눈빛으로 관객을 빠져들게 한다. 여기에 묵묵히, 든든하게 그 옆을 지키며 그녀에게 희망을 주는 장한(박해일)이 신사적이면서도 조국을 위해 대담하게 활동하는 독립군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궁녀이자 덕혜옹주의 동무 역할을 하며 그녀를 지키는 복순(라미란)과 독립운동가이자 장한의 오랜 동료 복동(정상훈)은 재치 있는 연기로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여기에 친일파 이완용의 수하 한택수 역을 맡은 윤제문이 악랄하고 이기적인 연기로 영화의 갈등을 고조시킨다. 고종을 연기한 백윤식은 적은 분량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연기를 펼쳐 영화에 힘을 더한다.
덕혜옹주는 식민지배 하의 서글픈 국민을 떠오르게 한다. 억압하는 일제에 맥없이 당하는, 그러나 결코 변절하지 않고 독립될 그 날만을 기다리는 힘없는 국민을. 영화는 덕혜옹주를 영웅시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진 않았지만,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일제와의 타협을 뒤로하고 고국만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비춰진다. 당시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그녀의 삶을 통해 당시의 서글픈 현실을, 그리고 대한조국의 마지막 황녀의 삶을 한 번 쯤 봐 달라고 말한다.
그 쓸쓸한 덕혜옹주의 삶을 통해 본 어두운 현실, 그리고 불행했던 일본에서의 삶과 수십 년이 지나서야 신체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고국 땅을 밟은 그녀의 모습이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한 여인의 운명이 시대의 소용돌이에 의해 그토록 기구해 졌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동시에 대한제국의 왕실의 마지막이 그렇게 초라하게 막을 내렸단 점이 씁쓸함을 남긴다.
‘덕혜옹주’에는 덕혜옹주와 장한의 거의 드러나지 않는 애정관계가 있다. 고종황제가 일찌감치 일제에 의한 덕혜옹주의 정략결혼을 막고자 약혼을 추진하면서 덕혜옹주와 정한이 어린 시절 만나게 되고 이후 장한은 덕혜옹주가 일본에 끌려간 뒤에도 계속해서 그녀를 지킨다.
이 과정에서 장한과 덕혜옹주의 애정은 지극히 절제된 상태로 드러나며 그럼에도 장한을 향한 덕혜옹주의 강한 신뢰의 감정과 덕혜옹주를 지키겠다는 굳건한 장한의 마음만은 명확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무언가 정확한 그림을 보여주지 않지만 이는 두 사람이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줄 수 없는 시대적, 상황적 요건에선 오히려 로맨틱한 여운을 남긴다.
러닝타임 127분. 12세 이상 관람가.
[최정은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