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정’ 엄태구 “작품 안의 인물로서 살아있고 싶었다” [인터뷰]
- 입력 2016. 09.09. 09:59:51
- [시크뉴스 이보라 기자] 2007년 '기담'으로 데뷔한 이후 '잉투기' '차이나타운' '베테랑' 등을 통해 차근차근 필모를 쌓아온 엄태구의 연기 인생에 ‘밀정’은 터닝포인트가 될만했다.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은 엄태구는 송강호와 마주하고 대립하는 장면에서도 밀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며 엄태구의 발견이라는 평도 들었다. '밀정'에서 큰 역할을 맡고 그만큼 관심도 받았지만 그에게 '밀정'은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녔다.
“배우를 하는데 있어서 저한테 이미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밀정'으로 인해 연기를 갑자기 잘 된 것은 아니지만 배우로서 작품에 임할 때 조금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 등에 대해 알게 됐고 저한테는 연기를 하는데 있어서 ‘밀정’ 전과 후가 나뉘는 거 같아요. 그만큼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었어요.”
엄태구는 자신이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송강호의 배려 덕분이라며 겸손한 면모와 함께 선배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송강호 선배님 매번 다르게 연기를 해도 다 받아주셨어요. 그것 자체도 감사했고 일단은 그렇게 연기할 수 있게 해주신 김지운 감독님께 감사했어요. 족쇄를 끊어주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또 송강호 선배님은 제가 다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해도 묵묵히 받아주시고 끝나고 잘했다고 격려도 해주셨어요. 감독님과 선배님께 제가 은혜를 받았죠."
‘밀정’에서 송강호, 공유, 한지민과 특별 출연 외 다른 배우들은 모두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됐다. 특히 이정출(송강호)와 대립하는 하시모토 역은 오디션을 본 많은 배우들이 원했던 캐릭터였다. 엄태구 역시 하시모토 역을 원했고 김지운 감독에게 전율을 느끼게 한 덕에 하시모토를 연기하게 됐다.
“오디션을 하시모토만 본 건 아니었어요. 정보원부터 의열단까지 다 봤는데 그 중에서 하시모토 부분은 두 장면을 연기했어요. 이정출한테 ‘정보가 쓰레기면 정보원을 바꾸셔야죠’라고 했던 장면, 기차 식당칸에서 송강호 선배랑 공유 선배가 앉아있으면 그 사이에 들어가는 두 장면을 봤죠.”
엄태구에게 '밀정' 오디션장은 좀 더 특별하게 기억됐다. 그는 "김지운 감독님 덕분에 편하게 할 수 있었다"며 그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했다.
“저도 하시모토 역을 원했지만 수년간 오디션을 보면서 기대가 큰만큼 실망이 크다라는 걸 느낀 적이 많았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요. 또 김지운 감독님 작품이기 때문에 어떤 역할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디션장에 갔어요. 감독님 혼자 계셨는데 기존 오디션장이랑은 달랐어요. 현장에서 디렉션 주시듯이 ‘이렇게 해볼까’라고 하시고 그런 식으로 오디션이 진행되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디렉션 주시는 거에 맞춰 편하게 할 수 있었죠.”
하시모토는 어릴 적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로 많은 양의 일본어 대사를 소화해야했다. 아무리 캐릭터를 열심히 분석하고 준비했어도 말이 안 되면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 일본어 선생님이 녹음해주신걸 끊임없이 반복해 들으며 치열하게 준비했지만 일본어를 하기 싫었던 순간도 있었다고 밝혔다.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다녀온 후 일본어가 하기 싫을 정도로 제가 생각한 이상의 여파가 있었어요. 허름한 길을 걷다가 가다보면 나오겠지 했는데 그 옆에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라고 적혀있는 걸 봤어요. 그 순간부터 충격이었죠. 이렇게 허름한 곳에 있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안에 들어가면 그때 쓰셨던 방이랑 화장실, 사진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요. 제가 잘 우는 사람도 아닌데 아무도 없었으면 아마 펑펑 울었을 거예요. 그 정도로 뜨거워지더라고요. 며칠 후면 내가 하시모토를 연기해야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많이 됐어요. ‘작품에 최선을 다해서 기여하자, 보탬이 되자’하는 생각을 했고 그만큼 진지하게 시대극에 접근하려 했어요.”
하시모토를 연기하기 위해 참고했던 작품이나 자료에 대해 묻자 엄태구는 하시모토를 보면서 매가 생각났다며 매사진을 봤다는 재밌는 대답을 내놨다. 그는 “대본을 보고 하시모토가 먹이감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이 '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딱 잡는 모습이 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사진을 보고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매와 같은 인물인 하시모토를 표현하는 데는 엄태구의 살벌한 눈빛, 짙은 눈썹과 더불어 중저음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원래 목소리가 허스키해요. 어려서부터 그런 건 아니고 20대 때부터 조금씩 상했는데 건강상에는 이상이 없다니 그냥 이렇게 살고 있어요. 연기할 때도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사회 끝나고 무대인사를 하는데 관객분들이 웃으시더라고요. 아마 목소리 때문에 웃으신 것 같아요.”
김지운 감독과 엄태구의 인연은 영화 '악마를 보았다' 때부터 시작됐다. 엄태구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형사4로 출연했다. '밀정' 제작보고회 당시 "김지운 감독님이 ‘태구야’라고 불러줘서 감동했다. 평생 못 잊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는 엄태구는 김지운 감독과 다시 만난 감회에 대해 "기분이 묘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감사한 생각이 크게 들었어요. 잘해서 믿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고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김지운 감독님이 참 대단하신 분 같았죠. 저를 캐스팅해서가 아니라 저같이 인지도가 없는 배우한테 큰 영화에 출연할 기회를 주신 것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됐어요.”
엄태구는 특히 영화의 브릿지가 되는 기차 시퀀스를 통해 이정출과 김우진(공유) 사이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두 선배 배우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뿜어내야하는 장면으로 엄태구는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다. 그 장면에서 선배들을 뒤에서 쳐다보고 앞으로 다가가고 옆으로 쳐다보면서 대사를 해야 되는데 제가 뭘 잘 못 잡아서 감독님이 그런 디테일한 부분을 하나하나 다 잡아주셨다”고 말했다.
기차 시퀀스 장면뿐만 아니라 엄태구에게 ‘밀정’이라는 영화는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연기나 캐릭터 때문에 힘든 것도 있었지만 캐스팅을 해준 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고.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밀정'에 참여한 엄태구는 기여가 될만한 연기로 보답했다.
“힘든 데는 모든 것들이 다 작동했던 것 같아요. 저를 믿고 캐스팅해주신 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과 ‘송강호 선배와 어떻게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일본어 대사에 대한 부담감과 시대극을 다룬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 등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있었어요. 특히 상해임시정부청사에 갔다온 후에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임해야할까’ 생각한 끝에 ‘최대한 이 작품에 이 인물로서 살아있게 하자’는 다짐을 하고 연기에 임했어요.”
[이보라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이미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