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상 STORY] 죽여주는 여자-계춘할망-장수상회 윤여정, ‘그래니룩’의 다중성
입력 2016. 10.11. 15:54:30
[매경닷컴 시크뉴스 한숙인 기자]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받아들임, 즉 수용이다. 나와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수용은 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긴 이들에게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항목이기도 하다.

굳이 배우를 들먹이지 않아도 수용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덕목이지만, 배우에게 필요한 수용의 전제조건은 ‘조건 없음’으로 조금은 다른 궤도를 걷는다. 자신에게 내재된 색으로 재해석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면이 한 치의 빈 공간 없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면 배우에게 필요한 채움 즉 조건 없는 수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윤여정은 외모와 신체조건이 객관적 미적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음에도 몸에 밴 세련된 애티튜드가 태생적 여배우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윤여정의 배우로서 힘은 작품 속에서 전혀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비움과 채움의 본능적 수용으로 완성해내는 공감이다.

윤여정은 2015년 4월 ‘장수상회’, 2016년 5월 계춘할망에 이어 이달 10월 ‘죽여주는 여자’까지 1년 6개월 남짓한 기간 연이어 개봉한 3편의 노인을 다룬 영화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70세에 찾아온 첫사랑의 설렘을 담은 장수상회에서는 노년에도 코스모스 같은 여린 여성미를 간직한 금님으로, 혈연이 가족의 필요충분 요건임을 신봉하는 다수의 생각이 편협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계춘할망에서는 억척스러운 제주도 할머니 계춘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의 삶을 그린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박카스 아줌마 소영으로 관객과 마주선다.

특히 노년이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하면 도심 할머니의 소녀스러움, 시골 할머니의 정감 넘치는 억척스러움, 거칠게 한 세월을 산 힐머니의 억지스러움, 이 각각 다른 감성을 담은 그래니룩을 완벽하게 소화해내 관객과 캐릭터의 거리를 좁혔다.

영화 '장수상회' '계춘할망'

장수상회에서는 파스텔 핑크의 피터팬 칼라 트렌치코트, 보드라운 살구색 카디건과 프린트 블라우스, 색색의 실로 짠 보슬슬한 털의 카디건과 크림색 보우타이 블라우스로 완성된 소녀감성 꽃집 할머니 금님의 사랑스러움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계춘할망에서는 버건디색 니트 베스트 혹은 카디건, 와인 앤 네이비색 타탄체크 패턴의 넉넉한 카디건 등 제주도 자연풍광과 어우러지는 색감으로, 도심 할머니 금님과는 다른 시골 할머니 계춘의 투박한 사랑스러움을 절묘하게 살려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두 영화를 관통하는 사랑스러움의 틀에서 완벽하게 이탈해 거친 노년을 담은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데님재킷, 스웨이드코트, 유행이 한참은 지난 트렌치코트 등 과거 젊음에 대한 서글픈 집착을 담은 아이템을 마치 자신의 옷장에서 꺼내 입은 양 자연스럽게 일체를 이뤘다.

무엇보다 옷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과 말투는 ‘노인’라는 단어로 60대 이후의 남녀를 획일화해 버리는 사회의 시선에 반하는 여자 캐릭터를 완성해낸다.

윤여정과 함께 작업한 영화의상 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캐릭터가 빛을 발한 수 있었던 데는 윤여정의 진짜 배우다운 애티튜드가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죽여주는 여자’ 함현주 실장은 “제가 오히려 꼰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개방적 사고를 가졌다”라며 정말 좋은 경험이었음을 토로했다. 또 ‘계춘할망’ 최은정 실장은 “배우 본인 이미지가 예뻐서 계춘만의 사랑스러운 느낌이 잘 살았다”라며 캐릭터와 배우의 합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윤여정은 올해 나이 70세로 쌓아온 세월의 무게만큼 바꾸기 어려운 가치관과 신념들로 꽉 채워져 있을 법하지만, 배우로서 이러한 틀을 걷어내는 프로정신을 발휘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의 엄마 혹은 할머니, 누구의 아내로만 존재하는 배우의 좁은 틀을 윤여정은 과감히 걷어내고 억지스러움 없이 자연스럽게 제 나이 그대로의 모습인 채로 주인공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는 종심(從心) 70세의 나이에 본인 스스로 여배우라고 주장하지 않음에도 윤여정은 관객에게 늘 ‘여자 배우’로 각인되고 있다.

[한숙인 기자 news@fashionmk.co.kr/ 사진=영화 ‘장수상회’ ‘계춘할망’ ‘죽여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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