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왕’ 한 번쯤 여유를 되찾아 보길 [씨네리뷰]
입력 2016. 10.15. 22:21:36
[시크뉴스 최정은 기자]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

제 딴에는 고민도 하고 노력해 보기도 했을 ‘요즘 애들’이 듣기에 이토록 냉정한 말이 또 있을까. ‘걷기왕’(감독 백승화, 제작 인디스토리)은 어른들은 좀 더 고민을 나누고 문제점을 함께 찾아 해결하려는 세심한 태도를 보이고, ‘열심히’ ‘잘’이란 말에 짓눌린 아이들은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고 깊은숨을 쉬어보라 말하는 쉼표 같은 영화다.

네 살에 발견된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세상의 모든 교통수단을 탈 수 없는 만복(심은경)은 오직 두 다리만으로 왕복 네 시간 거리의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씩씩한 여고생이다. 꿈과 열정을 강요당하는 현실이지만 뭐든 적당히 하며 살고 싶은 그녀의 삶에 어느 날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걷는 것 하나는 자신 있던 만복의 놀라운 통학 시간에 감탄한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그녀에게 딱 맞는 운동인 경보를 시작하게 된 것. 공부는 싫고 왠지 운동은 쉬울 것 같아 시작하는데… 과연 천하태평 만복은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을까.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09) '반드시 크게 들을 것 2: WILD DAYS'(2012) 등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담아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 백 감독은 이제 '걷기왕'으로 조용히 관객을 위로한다. 영화에서 학생은 '사이다' 같이 시원하게 현실적인 말을 쏟아내고 어른은 이상적인 말과 '불통'의 태도로 아이들의 마음에 대한 공감 능력이 상실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영화엔 비판적 시각이 담겼지만 소재를 무겁지 않게 다루고 곳곳에 유머 장치와 따뜻한 분위기를 첨가해 전체적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관객이 마음 편히 영화를 보는 가운데 은은한 파장이 마음에 가닿아 일상의 쳇바퀴에서 정신 없이 돌아가던 이들에게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의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실사 영상을 프레임별로 한 장 한 장 뽑아내 그 위에 그림을 덧입혀 움직임을 표현하는 작업방식)에서부터 시작된 동화 같은 미장센을 쏟아낸다. 게다가 재기발랄한 OST는 영화를 전체적으로 사랑스럽게 만든다. '타이타닉' OST 리코더 연주, 만복의 첫사랑 효길로 출연한 이재진이 직접 한 랩, 앤딩에서 흘러나오는 백 감독이 작사하고 심은경이 부른 노래 등은 어딘지 완벽하지 않지만 경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이들 OST는 영화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과 맥락을 같이 해 관객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인다.



특징을 살린 인물들의 캐릭터와 배우의 연기도 보는 재미를 준다. 만복(심은경)은 엉뚱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유쾌한 매력을 뽐낸다. 담임 선생님(김새벽)은 만복의 걷기 능력에 놀라 육상부 입단을 추천하며 지나치게 열정과 노력을 강요하지만 실은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큰 인간적인 면도 갖고 있다. 만복의 육상부 선배인 수지(박주희)는 쿨하고 시크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마음 따뜻한 인물이다.

아기자기한 로맨스와 유머도 극의 재미를 더한다. 중국집 배달원 효길을 향한 만복의 짝사랑과 육상부 코치(허정도)의 만복의 담임 선생님을 향한 애정 역시 유쾌하게 묘사돼 웃음을 준다. '소순이'(안재홍)의 내레이션을 통한 동물의 의인화, 의외의 포인트에서 일어나는 인물의 감정의 동요 등 감독의 센스가 느껴지는 유머가 곳곳에 담겨있다.

대한민국 청소년은 미래를 위해 획일화된 교육제도 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바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좌절하고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으며 현실을 외면한 채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아이들도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영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또 선생님, 부모님 등의 성인 뿐만 아니라 학교 선배 등을 통해 열정과 노력을 강요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나쁘진 않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그들 역시 불완전한 생각을 지닌 인간임을 묘사한다.

반면 교육제도의 틀 안에서 자신의 꿈을 갖고 공부하는 아이들이나, 공부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또렷한 목표를 설정해두고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청소년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비록 자의적이진 않았지만 목표를 설정하게 된 주인공을 통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이들에게도 시련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외면하고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린다면 언젠가 넘어져 버릴 수 있단 사실도 일깨운다. 이를 통해 '열심히'도 좋지만 한 번쯤, '조금 천천히 가는 건 어떨까'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무심코, 또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노력하겠습니다’‘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살아온 우리에겐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한심하고 도태된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하지만 영화는 ‘꿈이 꼭 있어야 하나’라고 반문한다. ‘왜 꼭 열심히 해야 하나’하는 질문을 던지며 ‘천천히 가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 같은 질문과 메시지는 설득력 있는 전개를 통해 관객에게도 '마음의 여유'에 대해 똑같이 자문하게 한다. 오는 20일 개봉. 러닝타임 92분. 12세 이상 관람가.


[최정은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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