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지켜주지 못한, 지켜야 할 소녀들을 위한 울림 있는 목소리 [씨네리뷰]
입력 2017. 02.13. 17:22:04
[시크뉴스 최정은 기자] ‘위안부.’ 대한민국 국민의 아픈 역사이자 오랜 세월 해결하지 못한 문제, 지금은 더 늦기 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다.

과거 지켜주지 못한 소녀들, 그 소녀들은 지금도 나이 들고 주름 가득한 할머니들의 마음속에 아픈 소녀인 채로 남아 있다. 이나정 감독과 류보라 작가는 ‘더 늦기 전에’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눈길’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올해 제37회 반프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 최우수상, 제24회 중국 금계백화장 최우수 작품상·여우주연상, 제67회 이탈리아상 프리 이탈리아상을 수상하고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제18회 상하이국제영화제, 제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눈길’이 다음 달 1일 개봉된다. 지난 2015년 KBS1에서 드라마로 방송된 바 있는 ‘눈길’은 편집을 거쳐 영화로 관객을 만날 준비를 마치고 3·1절에 관객을 만난다.

1944년 일제강점기 말, 가난하지만 씩씩한 종분(김향기)과 부잣집 막내에 공부까지 잘하는 영애(김새론)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운명을 타고났다. 똑똑하고 예쁜 영애를 동경하던 종분은 일본으로 떠나게 된 영애를 부러워하며 어머니에게 자신도 일본에 보내달라고 떼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남동생과 단 둘이 집을 지키던 종분은 느닷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들의 손에 이끌려 낯선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종분은 또래 아이들이 가득한 열차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유학간 줄 알았던 영애가 열차 칸 안으로 던져진다. 같은 운명이 되어버린 두 소녀 앞에는 지옥 같은 전쟁이 펼쳐지고 반드시 집에 돌아갈 거라 다짐하는 종분을 비웃듯 영애는 끔찍한 현실을 끝내기 위해 위험한 결심을 하는데… 이들은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종분의 꿈속인 1944년 눈길을 달리는 종분과 영애의 모습을 시작으로 현재와 1944년을 오간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종분은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위안부에 끌려간 당시의 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의 경험은 그녀에게 지금도 악몽으로 이어질 만큼 절대 잊지 못할 끔찍한 경험이다. 마을의 똑똑하고 예쁜 또래 소녀를 동경하고 그의 자상한 오빠를 남몰래 좋아하던 평범한 소녀인 그가 겪은 일은 그의 꿈과 희망을 꺾고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다. 그녀가 동경하던 똑똑하고 예쁜 영애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비극의 어두운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세상의 보호를 받아야 했을 소녀들. 그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건 비단 그 시절뿐만이 아니다. 할머니가 된 종분은 홀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 그녀의 이웃은 홀로 근근이 버티는 고등학생. 그녀는 생활고로 인해 비뚤어진 모습이다. 그런 그녀를 무심한 듯 지켜보는 종분은 결국 그녀가 완전히 엇나가지 않도록 돕기 위해 나선다. 보호받아야 할 소녀에 대한 절절한 공감과 안타까움에서 나온 행동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보호받아야 할 소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한다.

김새론은 중국 금계백화장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유를 충분히 보여준다. 그녀의 강인함이 묻어있는 눈빛,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연기는 ‘아역 배우’라는 수식어보단 ‘배우’라는 수식어가 더 자연스러울 만큼 보는 내내 관객을 사로잡는다. 종분은 귀엽고 순수하며 정 많은 캐릭터를 연기한 김향기에게 적역이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과 앳된 외모는 어린 소녀들에게 닥친 현실의 비극과 대조를 이룬다.

‘눈길’은 위안부를 소재로 하지만 자극적 장면은 피했다. 자극적 장면 없이 잔잔한 장면으로 피해자의 아픔·슬픔을 충분히 전한다. 드넓게 펼쳐진 흰 눈길, 인물이나 상황이 주는 감정에 따라 변주를 하면서도 일관적으로 잔잔한 음악을 통해, 덤덤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비극에서 오는 슬픔을 끊임없이 전달한다.

자극적인 장면으로 극적 연출을 하거나 배우들을 끔찍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을 최대한 피한 것은 이나정 감독과 류보라 작가의 배려다. 위안부 피해자, 배우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이 같은 연출 방향은 스스로에게 피해자의 아픔과 슬픔을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없이 전달하는 노력을 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슬픔 아픔을 공감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영상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영화 속 눈길은 아름다웠지만 소녀들이 사는 세상은 슬프고 아팠다. 영화는 비록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이 영화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속에서 상처받은 채 남아있는 소녀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나아가 더는 상처받는 소녀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지켜주지 못한 소녀들, 지켜야 할 소녀들을 위해 그들은 다시 한 번 세상에 잔잔하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낸다.


[최정은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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