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열’, 진중함에서 탈피한 시대극의 유쾌한 공감 [씨네리뷰]
- 입력 2017. 06.15. 10:25:02
- [시크뉴스 김다운 기자] 일제강점기와 같이 아픈 역사를 다루는 작품들에는 대개 웃음이 없다. 위안부 문제부터 무자비한 학살, 인권유린 등의 처참한 광경과 그 속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외침을 보고 있으면 먹먹함에 가슴 한켠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이러한 관습에 반기를 들었다. 진중하고 어두운 분위기 대신 그 시대 조선인들의 해학과 익살로 진심을 전하는 ‘박열’은 유쾌함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준익 감독의 열두 번째 작품인 ‘박열’은 관동대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1923년 당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그린 영화다. 앞서 ‘사도’와 ‘동주’로 실존인물을 영화화하는데 집중했던 이준익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조선 최고의 불량 청년 박열이라는 낯선 인물을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박열이라는 인물의 등장만으로 영화는 여타 시대극과는 다른 신선함을 제공한다. 일제가 저지른 관동대학살을 무마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지목된 박열은 오히려 자신이 황태자 폭탄 암살을 계획했다고 자백하며 스스로 대역죄인이 된다. 그는 일본인 예심판사와의 심문 과정에서 마치 본인이 윗사람인양 반말을 하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재판에 서지 않겠다 협박하며 일본인들을 제 멋대로 굴린다.
재판장에서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다. 피고인의 신분인 박열은 조선의 전통 예복을 입고 법정에 등장해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며 일제의 만행을 고한다. 판사가 들어와도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뭐?”라며 불량스럽게 노려보는 박열에게 두려움과 망설임이란 없다. 지나치게 당당한 그의 모습은 다소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 하나까지도 고증을 통해 만들어냈을 만큼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겨 담았다.
이와 같은 박열의 당당함과 패기는 아픈 역사를 직면해야 하는 관객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그동안 늘 일본에 핍박받고 학대받던 모습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게 박열은 통쾌함을 선사하며 좀 더 희망적이고 밝은 기분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한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엄숙하고 심각해야 한다는 관습을 해학과 웃음으로 뒤엎어버린 이준익 감독의 발상은 시대극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의 행동 역시 독특하다. 불령사에서 박열과 함께 활동하는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조선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핍박받던 때의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제국주의 반대를 외친다. 박열과 후미코를 심문하던 예심판서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박열 내외의 진심과 일본 제국주의 사상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두 사람을 동정하기까지 한다. 또 변호사 후세다츠지는 박열의 무죄를 주장하고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앞장서며 후에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한국 작품들에서 일본인은 잔인하고 악한 면을 부각시켜 표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열’에서 일본인들은 박열의 꾀에 쉽게 놀아나는가 하면 때로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박열’은 이러한 낯선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단순히 조선의 독립이 아닌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 정신과 인간의 자유라는 영화적 메시지를 확고히 한다. ‘박열’이 단순한 반일 영화가 아닌 현 시대에서도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유다.
‘박열’은 의미와 재미의 균형을 살리며 상대적으로 가벼운 시대극을 완성해냈다. 하지만 진중함이 부족한 한계였을까 ‘사도’의 사도세자, ‘동주’의 송몽규 등의 인물들처럼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는 부족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박열이라는 인물보다 그를 만난 후 변화를 겪게 된 일본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전 시대를 통틀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박열’은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전형적인 이준익 감독표 감동이 아닌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박열’은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오는 28일 개봉. 러닝타임 129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다운 기자 news@fahsionmk.co.kr / 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