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연출X연기 시너지, 살아 움직이는 소설을 만들다 [씨네리뷰]
입력 2017. 09.06. 13:21:54
[시크뉴스 최정은 기자] 소설을 ‘본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책의 활자가 튀어나와 이미지로, 음성으로 바뀌어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원신연 감독은 책 속 검정 글씨에 색을 입히고 움직이게 해 소설을 보는 것으로, 그리고 음성을 더해 듣는 것으로 만들었다. 2D로 존재하던 검정 글씨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스산한 배경이 되고 미스터리한 공기가 되어 스크린에 녹아들어갔다.

예전에는 연쇄살인범이었지만 지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병수. 우연히 접촉사고로 만나게 된 남자 태주에게서 자신과 같은 눈빛을 발견하고 그 역시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병수는 경찰에 그를 연쇄살인범으로 신고하지만 태주가 그 경찰이었고 아무도 병수의 말을 믿지 않는다. 태주는 병수의 하나뿐인 딸 은희 곁을 맴돌며 계속 병수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병수는 혼자 태주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록하고 쫓지만 기억은 자꾸 끊기고 오히려 살인 습관이 되살아나며 망상과 실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진다.

전작 ‘세븐 데이즈’(2007) ‘용의자’(2013) 등에 이어 4년 만에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돌아온 원신연 감독은 이번에도 장르 영화의 전형적 틀을 깬 감각적 연출을 택했다. 큰 틀은 소설과 일치시켰다. 소설에 없는 병수의 오랜 친구 병만(오달수)이 등장하는 등 그 안에서 캐릭터에 변화를 주고 인물 구성에도 차이를 두는 등 매체에 맞게 변주했다. 장르에 어울리는 속도감 긴장감에 블랙유머를 얹은 것도 돋보인다. 중간 중간 스릴러가 주는 긴장감을 완화시킴으로써 영화가 더 풍성해지고 관객은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다.

병수에 설경구는 적역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보는 이를 이미 빠져들게 하는 그의 연기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까지 몰입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연쇄살인범이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알츠하이머에 걸려 혼란스러워하는 5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흐름에 따른 인물의 내면과 외형의 변화를 거슬릴 것 없이 표현했다. 관객이 집중하지만 부담스럽게 느끼지는 않을 정도의 연기를 보여주며 극의 흐름에 따라 나아가기 보다는 주도적으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이다.

병수(설경구)의 살인습관을 되살아나게 한 의문의 남자 태주를 연기한 김남길은 극적인 장면 보다는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연기를 통해 극 중 인물에게도 관객에게도 알 수 없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는 선악을 넘나들며 순간순간 변화한다. 따뜻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얼굴, 그 안에서 펼쳐내는 무심한 듯 조용한 광기는 그의 주특기인 것처럼 보인다.

김설현은 표현의 폭이 좁다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병수의 딸 은희 역을 큰 무리 없이 소화했기에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 아이돌이라는 꼬리표는 관객이 그녀를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 볼 수 있을 만큼 작품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그녀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연기를 보여줄지 두고 보겠다는 관객의 매서운 평가를 거쳐야 한다. 부족한 면을 드러내는 순간, 반드시 혹독한 평을 듣게 되어있다는 점에서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터다. 반면 연기에 대한 관객의 기대치가 낮아질 수 있어 그 만큼 나쁘지 않은 연기를 보여줬을 때 그에 대한 평도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돌이라는 꼬리표는 그녀에게 양날의 검이다.

설경구가 연기한 인물의 1인칭시점의 내레이션이 극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설경구는 마치 관객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내면의 갈등이나 생각을 상세히 들려준다. 대사를 하는 대신 그의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을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으로 극이 진행되기에 관객은 어느 정도 그에게 동화된다. 연쇄살인범이었던 인물이지만 살인의 대상이나 이유 등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데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함으로써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

영화는 집, 대나무 숲 등의 음울하거나 긴장감이 도는 배경과 음악, 스산함이 느껴지는 푸른빛이 도는 화면으로 움직이는 그림책을 펼쳐내듯 살아있는 소설을 접하는 것 같은 감흥을 준다. 맹목적으로 소설을 묘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소설을 접한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라는 매체에 맞게 재탄생시키려한 노력이 돋보인다. 연출도 배우의 연기도 어느 하나에 기대어가지 않고 시너지를 내며 균형을 이뤘다.

6일 개봉. 러닝타임 118분. 15세 이상 관람가.


[최정은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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