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이제훈의 찡한 속임수 [씨네리뷰]
입력 2017. 09.21. 13:29:08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시크뉴스 김다운 기자] 관객들은 대개 영화를 보기 전 포스터와 예고편으로 작품의 성격을 짐작한다. 포스터의 색감과 전체적인 분위기, 예고편에 압축된 스토리와 배우들의 대사는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말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이러한 관객들의 예상을 철저히 빗겨간다. 추석을 앞두고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흔한 코미디 영화의 가면을 쓴 ‘아이 캔 스피크’는 그 이면에 숨겨둔 전혀 다른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쎄시봉’ 등을 통해 사람을 향한 따뜻하고 섬세한 감정을 보여줬던 김현석 감독이 2년 반 만에 신작 ‘아이 캔 스피크’를 들고 극장가를 찾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과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영어를 통해 운명적으로 엮이게 되면서 진심이 밝혀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밝은 색감의 포스터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나문희와 이제훈의 모습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 영화는 초반부터 관객들에게 잔잔한 웃음을 선사하며 유쾌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낯선 남자와의 과도한 밀착으로 불편해하는 민재의 얼굴을 시작으로 양팀장(박철민), 아영(정연주), 종현(이지훈) 등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명진 구청 직원들의 모습, 검은 우비를 뒤집어 쓴 옥분의 등장까지 영화는 별다른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감춰져있던 옥분의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환된다. 정체불명의 외국인에게 전화를 걸다 황급히 끊어버리는가 하면 적지 않은 나이에 영어 공부에 매달리고, 치매에 걸린 친구의 앞에서 “그놈들 무릎 꿇는 거 봐야 한다며”라며 울부짖는 옥분의 모습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영화를 즐기던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사연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 궁금증의 뒤에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실과 아픔을 휴먼 코미디라는 장르 속에 교묘하게 숨겨 관객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늘 처절하고 비극적으로만 다뤄졌던 역사적 아픔을 밝은 분위기와 색감, 따뜻하고 훈훈한 인물들의 관계 속에 자연스레 녹여낸 영화의 접근 방식은 관객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웃음과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잡았다.


영화의 영리한 전개 방식을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는 건 무엇보다도 나문희의 열연이다. 영화는 과거의 상황을 재연하는 것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옥분의 설움을 통해 역사적 아픔을 보여준다. 과거 어린 옥분이 위안부로 끌려갔던 장면이 잠깐 나오긴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이 없었어도 나문희의 눈빛과 주름진 얼굴, 표정 하나하나는 그동안의 옥분이 느꼈던 아픔과 한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별한 명대사 없이 “아임 파인 땡큐, 앤유?” “아이 캔 스피크”라는 나문희의 한 마디 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아린 이유다.

앞서 “시나리오를 본 순간 옥분 역에 나문희 선생님을 떠올렸다”는 이제훈의 말처럼 나문희는 옥분 그 자체였다. 물론, 43년의 나이 차를 극복한 이제훈과의 사랑스러운 케미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옥분은 깐깐하고 오지랖 넓은 성격 탓에 동네 사람들의 기피 대상 1호로 통하지만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된 이웃들은 그녀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옥분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은 민재를 비롯한 구청 직원들과 시장 사람들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두 시간여 동안 옥분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우리 주변 어딘가 있을 또 다른 옥분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결국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그렇듯, ‘아이 캔 스피크’ 역시 과거의 아픔을 잊고 살아가는 관객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그리고 포스터 속 웃고 있는 배우들의 얼굴 뒤에 숨겨진 눈물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올 가을, 반갑게 손을 흔들며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를 외치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꽤 오랜 시간 관객들의 귓가에 맴돌 듯 하다. 21일 개봉. 러닝 타임 119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다운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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