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 비극적 역사를 통해 화두를 던지다 [씨네리뷰]
- 입력 2017. 10.02. 17:19:34
- [시크뉴스 최정은 기자]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룬 영화 ‘남한산성’은 슬픔, 비애, 굶주림, 추위로 가득하다. 푸르스름한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서늘한 눈발만큼이나 마음이 추워지는 왕과 대신, 백성의 얼굴은, 마치 얼음장에 굳은 듯 슬픈 표정조차 마음껏 짓지 못한다. 그 침통함이 만들어내는 공기는 척박한 땅의 겨울을 더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남한산성’의 영화화를 제안받은 황동혁 감독은 인조가 청에 항복하는 굴욕 이전에, 그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고민했던 것들이 현재를 고민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출을 맡았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민하는 기회를 주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동명의 원작 소설을 쓴 김훈 작가의 글이 지닌 힘, 비장함, 비애가 느껴지지만 아름다운 풍경, 대화 등을 최대한 살려 스크린에 옮기고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를 참고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결사 항쟁을 주장한 척화파 김상헌(김윤석)의 논쟁과 대립, 그리고 두 신하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조(박해일)의 이야기를 다뤘다.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의 치열한 47일, 이들이 논쟁하며 쏟아내는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말과 말이 부딪히면서 내는 에너지와 감정의 울림을 전한다.
조선에 새로운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청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신하, 이조판서 최명길 예조판서 김상현은 비록 의견은 달리하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은 하나로 통한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후일을 도모하려는 주화파의 의견과 청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고자 하는 척화파. 인조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두 신하의 의견 사이에서 고뇌한다.
극 중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이 삼각 구도를 이루며 보여주는 연기는 영화가 주는 큰 재미다. 이병헌 김윤석이 각각 연기한 최명길 김상헌의 논쟁은 진중하고 단호하다. 그 사이에서 근심하는 인조를 연기한 박해일의 눈빛은 혼란과 고독을 내포한다. 그는 고립된 성에서의 추위, 궁핍, 청의 압박 등으로 상심한 내면 연기를 보여준다. 극적 재미를 끌어올리는 캐릭터는 영의정 김류(송영창)다. 그는 소설과 비교했을 때나 타 캐릭터 대비 좀 더 희화화되고 드라마틱하게 표현됐다. 열세 속, 굳건히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어사 이시백(박희순)은 전장에서의 장수의 모습을 통해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영화는 곳곳에 신분제를 비판하는 요소를 심었다. 가장 정면으로 조선의 신분제에 반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조선 천민 출신의 청나라 역관 정명수(조우진)다. 그는 노비 집안에서 태어나 사람답지 못한 취급을 받던 조선에서의 과거를 뒤로하고 청의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으로 관직에 오른다. 스스럼없이 남한산성의 성문을 여는데 앞장서는 그의 모습에서 조선을 향한 응어리가 드러난다. 민초인 서날쇠(고수) 역시 대장장이로, 천한 신분이지만 누구보다 정의롭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신분의 고하가 사람을 정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영화로 충실히 옮겨졌다. 청의 압박으로 궁지에 몰려 근심하는 임금과 신하의 표정과 그 안에서도 피어오르는 비장함이 이들의 표정과 몸짓, 음성을 통해 전해진다.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를 담은 뛰어난 미장센이 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는 과감한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섬세한 표정을 담았다.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 감독의 한국 전통 음악과 서양 교향악을 오가는 음악은 신선하면서도 이질감 없이 극에 녹아들었다.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은 북문전투다. 소설에서 크게 다룬, 김류가 300명을 성 밖으로 내려보낸 북문전투는 참패한 전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상업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는 빠지고 서사를 통해 정면으로 승부한다. 감동 웃음 교훈 신선함 등 ‘재미’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있다. 흔한 흥행 요소인 영웅의 등장이나 자랑스런 승리의 역사가 아닌, 비극과 굴욕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신선함이나 정직한 고증을 통해 당시를 생생히 들여다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연출도 구성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웰메이드’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에도 구멍이 없다. 다만, 화려한 CG(컴퓨터그래픽)나 판타지물, 퓨전 사극 등에 익숙한 관객의 경우 정공법을 택한 이 정통사극에서 재미를 찾는 방법에 있어 방향을 달리하는 등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할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총 11챕터를 거치는 동안 임금에게는 번뇌와 굴욕의 시간이 펼쳐진다. 그 춥고 긴 47일의 시간이 지나고 끝내 인조는 삼전도(조선 시대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던 나루)에 나와 청나라 황제 앞에 삼궤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를 올린다. 그 굴욕적인 항복 끝에는 희미하게나마 봄은 올 것이라는 희망이 피어난다.
끝까지 어느 것이 옳은지 결론을 내지 못할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결론이 아닌 질문, 즉 화두를 던진다.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질문을 던지고 논쟁을 하는 것,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을 비춰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닥쳐올 문제 앞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아울러 굴욕의 역사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이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옳은 태도가 아닌가 하는,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오는 3일 개봉. 러닝타임 139분. 15세 이상 관람가.
[최정은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