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 세대를 관통하는 울림을 주다 [씨네리뷰]
- 입력 2017. 12.27. 17:09:16
- [시크뉴스 최정은 기자] 장준환 감독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1984’(제작 우정필름)를 언론과 배급사에 공개한 시사회 직후 기자회견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옆자리에 있던 배우들의 눈물에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며 멋쩍어했지만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며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사망 당시 나이를 언급하다 다시 눈물을 보였다. 이내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을 닦아내는 그에게서 영화가 이토록 뜨거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보였다.
그야말로 ‘우리’가 만든 영화다. 면면이 화려한 주연급 배우들이 분량 적은 조연으로 자처해 나섰다. 지금까지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선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국민의 모습이 1987년 최루탄 속 그들과 다르지 않았고 스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 같은 뜻이 모여 깊은 울림을 전하는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 속 사람들, 그리고 현실의 사람들의 ‘그 날이 올까’라는 의심에도, 그날은 왔다. 과거에도, 지금도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가 모여 역사를 바꿨다. 이에 영화는 세대를 관통하고 현실과 뒤얽혀 가슴을 뜨겁게 한다.
영화는 박종철 열사로 시작해 이한열 열사로 끝난다. 1987년 1월, 스물두 살 대학생인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 숨지자 박처장(김윤석)은 이를 숨기려 서둘러 화장을 하려 하고 최검사(하정우)는 사인을 밝히려 부검을 밀어붙인다. 경찰은 단순 쇼크사로 몰아가지만 현장의 흔적과 부검 소견은 ‘고문에 의한 사망’을 가리킨다. 사건을 취재하던 윤기자(이희준)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보도하지만 박처장은 조반장(박희순) 등 형사 둘만 구속시켜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이 사실을 수배 중인 재야인사(설경구)에게 전달하려 조카인 연희(김태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하는데…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권력 수뇌부, 이에 맞서 각자의 자리에서 신념을 걸고 행동했던 사람들에 의해 광장의 거대한 함성이 일기까지, 가슴 뛰는 6개월의 시간이 펼쳐진다.
장준환 감독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이후 4년 만에 ‘1987’로 관객을 찾았다. 장 감독은 ‘1987’에서 드라마와 고증을 적절히 녹여내면서 울림을 주는 상업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픈 현대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은 것. 속도감 있는 전개, 다이내믹한 카메라 워크가 재미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핸드헬드 촬영으로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고 망원 줌과 접사렌즈를 통해 카메라가 대상에 접근하는 전통적 방법을 쓴다. 재해석된 부분도 있으나 캐릭터나 배경 등의 고증에 힘써 작은 소품 하나도 실제 당시의 것을 사용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 탓에 소품 의상 배경 등을 보며 당시를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건 카메라뿐만이 아니다. 하정우의 재치 넘치는 연기는 심심한 요리에 양념을 치듯 웃음을 준다. ‘정의로운 인물’이라 티 내며 외치지 않지만 능청스러우면서도 정도를 가는 캐릭터를 연기한 그 특유의 맛깔스러운 연기가 탄력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고 자연히 관객을 집중하게 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김윤석은 30년 전 신문에서 이 같은 헤드라인을 보며 ‘어떻게 저런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고등학교 2년 선배인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 은폐를 지시한 박처장 역을 맡아 이 대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박종철 열사의 30주기 추모 행사를 찾아 오히려 유가족으로부터 걱정과 응원을 받았다. 극 중 그의 눈빛 연기는 특히 눈길을 끄는데, 눈빛만으로도 관객을 휘어잡는 연기를 보여준다.
김윤석을 필두로 문성근 우현 유승목 등을 통해 권력의 어두운 면을, 하정우를 비롯한 유해진 김태리 설경구 김의성 오달수 등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정의로운 힘을 보여준다. 특히 유해진은 욣은 일을 위해 용기 낸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며 작은 힘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태리는 그런 삼촌을 둔 87학번 대학 신입생 연희 역을 맡았다.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삼촌을 마땅찮게 생각하고 데모를 하는 학생들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알기에 갈등하는 인물을 연기하며 당시의 평범한 젊은 세대를 대변한다.
영화에는 고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지난 날’ ‘그날이 오면’이 삽입됐다. 1987년 발표된 음반인 그의 노래 가사와 감성적인 멜로디가 관객을 울컥하게 한다. 마이마이, 타이거 운동화, 백골단 의상 등을 비롯해 4만 5000평 부지에 지은 연세대학교 정문부터 시청 광장, 명동 거리, 유네스코 빌딩, 코리아 극장 등의 오픈 세트와 압도적 분위기를 주는 당시 대공수사처 등은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둬 당시의 인물이나 분위기 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묵직한 울림을 주면서도 영화적 재미를 주는 이 영화는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도록 완벽함을 추구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완성도 있게 잘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중 후반부에서 살짝 늘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 정도다.
러닝타임 129분. 27일 개봉. 15세 관람가.
[최정은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영화 포스터·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