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모이’ 윤계상 “‘멋있다’고 생각한 정환, 이렇게 힘들 줄 몰랐죠” [인터뷰]
- 입력 2018. 12.26. 15:26:36
- [더셀럽 김지영 기자] 지난해 영화 ‘범죄도시’에선 악랄함의 끝을 보인 배우 윤계상이 ‘말모이’에선 강직함을 연기한다. 조선어학회 대표로서 그리고 친일파인 아버지를 둔 류정환을 연기한 윤계상은 중도를 지키는 연기로 극을 이끌어 나가지만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내년 1월 9일 개봉하는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는 1940년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경성을 배경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선어사전편찬을 위해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작전 '말모이'를 진행하는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정환이 원고를 들고 일본 순사들을 피하는 장면으로 막을 올린다. 만주 벌판에서 말모이 원고를 품에 안고 달음박질하는 절박함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말모이’의 첫 촬영 역시 이 장면이었다. 윤계상은 첫 씬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재미를 느꼈다.
“‘정환이 멋지다’정도만 생각하고 영화에 들어갔죠. 첫 촬영을 하고 ‘재밌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세트 촬영 들어가자마자 작살나고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정말 못하겠더라고요.”
윤계상이 힘듦을 토로한 이유는 ‘류정환이 가진 깊이’때문이었다. 극 중 인물의 인생을 대신 표현하는 배우들은 캐릭터의 감정과 변화, 성장 등을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940대의 류정환은 윤계상이 직접 겪은 슬픔과 책임감 등의 감정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눈을 피해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을 지킨다는 것,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빛을 보지 못하는 조선, 아버지를 비롯해 결국 현실에 타협하고 마는 조선인,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부상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류정환이 한글을 지키고자 하는 상태 등. 영화와 드라마, 문학 등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직접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인물이기 때문에 정환이 가진 막중한 책임감은 어디서 나온 건지 생각하다 죽을 뻔 했죠. 배우들이 자기를 투영해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잣대는 저예요. 슬픔도 저고. 슬픈 것들을 상상하는데 류정환은 깊이가 다른 것 같았어요. 사실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감정을 오히려 뺐죠.”
윤계상의 전작 ‘범죄도시’에서 장첸은 폭력성이 가감 없이 드러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하는 것에 반해 ‘말모이’의 류정환은 오로지 혼자 짊어지고 가는 느낌이 강하다. 조선어학회 동지들이 함께 있으나 대표라는 위치에서 오는 무게, 주변의 압박을 받고 있음에도 버텨야하는 것들 등으로 인해 한 번쯤 무너질 법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이 절제된 류정환을 표현한 윤계상은 ‘풀리지 않는 숙제를 잡고 있는 기분’이라고 비유하며 회상했다.
“말모이 사전 원고를 빼앗기고 지하창고에서 들어갔을 때 감독님께 ‘울어도 되냐’고 묻고 울었어요. 그랬더니 감정이 끝까지 가더라고요. 눈물이 멈추지 않고 오열이 됐어요. 결국 그 장면은 편집이 됐고 감정을 참는 게 정환의 고통이 극대화된 것 같아요.”
판수(유해진)에게 마음을 열기 전까지 류정환은 신경질적이고 날카롭다. 이러한 장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윤계상은 동료 배우에게 털어놓지 않고 온전히 혼자서 고민했다. 소통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캐릭터 몰입에 대한 문제도 아니었고 표현의 차이었다.
“표현에는 정답이 없지만 적절한 수준이 있어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를 표현하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 이상한 것 같았어요. 다 맞지 않는 것 같고 근사치도 못 간 느낌이었어요. 그동안 한 역할들 중에 제일 어려웠고 이것보다 어려운 캐릭터가 있을까 싶어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말은 민족의 정신’이라고 거듭 말하는 류정환의 대사들을 통해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한글을 지키려고 하는 류정환은 극 중 인물들과 대립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신념을 담아 마음을 전하고 의지를 표한다. 정작 윤계상은 이러한 대사들이 “버거웠다”고 했다.
“정환의 대사는 글로 쓰인 말 같아요. 북한 방송에서 듣는 말 같기도 하고요. 그게 얼마나 뱉기 힘든 말인지 연기자들은 알아요. 그런 말을 하되 앞뒤를 부드럽게 만들고 싶어 해요. 조금 더 현실적으로 하자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는데 그러면 정환의 무게감이나 힘듦이 표현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감독님이 ‘정면승부를 해 달라’고 매번 말씀하셨어요. 연기하기엔 정말 힘들었지만 그게 오히려 정환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정말 어렵고’ ‘죽겠고’ ‘힘들었다’를 여러 번 토로한 윤계상은 ‘말모이’를 촬영하면서 찾아가는 기쁨을 알았다. 한 장면을 20번 이상 찍는 어려움이 있었어도 배우로서의 후회는 없었으며 혹여나 다른 이들이 혹평을 해도 본인은 “만족한다”고 했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심지어 촬영을 하고 나서 ‘에너지 다 썼다’고 한 적도 있으니까요.(웃음) 제 입으로 못하겠다고 하는 건 진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뽑아 낸 건데 매번 그랬어요. 엄유나 감독님은 항상 ‘너 하는 데까지 해봐’라고 말씀해주셨거든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받는 순간 행복해지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했죠. 그땐 죽을 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제작 과정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영화에 참여한 윤계상은 관객이 ‘말모이’를 보고 자신과 같은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받는 입장에선 정말 이런 영화가 드물다는 걸 알아요. 영화를 보고 나서 ‘참 좋은 영화 잘 봤다’고 느끼셨으면 해요. 저랑 똑같이 정환이가 경험한 사건에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움과 재미를 느끼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김지영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