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 읽기] ‘세젤예’ 박정수 최명길 ‘이기적 모성’ 속 페미니즘戰
- 입력 2019. 05.13. 15:50:20
- [더셀럽 한숙인 기자] 페미니즘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여성주의’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주창하는 페미니즘은 사회 기득권층의 다수인 남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어 언뜻 남녀의 성 전쟁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현대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사회적 자아 찾기, 즉 내면의 전쟁이라는 시각이 더 현실성있고 설득력이 있게 다가온다.
KBS2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박정수 최명길
지난 12일 32회 시청률이 32.6%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KBS2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하 ‘세젤예’ )은 김해숙 박정수 최명길 세 엄마들을 통해 이상적 모성애의 선함과 그에 반하는 이기적 모성의 악함을 단순 대비하는 듯하지만 그들의 쏟아내는 대사의 면면은 단순하지 않다.
김해숙은 기존 주말드라마의 정체성을 흩트리지 않는 이상적 모성애로 중무장한 박선자 역할을 맡고 있다. 반면 과거 같으면 ‘악행’이라고 했을 법한 또 다른 두 엄마 허미옥과 전인숙 역을 맡은 박정수와 최명길이 그리는 이기적 모성은 과거와 달리 적대적이기 보다 중도적 뉘앙스가 짙게 배어있다.
주말 드라마라는 속성상 이기적 모성이 이상적 모성애로 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허미옥과 전인숙이 쏟아내는 대사들은 현 세대의 가장 민감한 화두인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조차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는 ‘모성론’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허미옥(박정수)은 박봉의 기자였던 정대철(주현)의 아내이자 1녀1남을 둔 어머니이다. 시부모에 시동생과 시누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를 견뎌낸 그는 며느리에게도 자신과 똑 같은 ‘여자의 도리’를 강요한다.
허미옥은 오랜 가사노동에서 해방돼 문화생활을 하며 자신이 규정한 ‘고품격’ 삶을 즐기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할 것을 강요해 곁에 뒀지만 각자 생활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개인주의 가족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노년의 삶을 누리던 미옥이 장모 박선자에게 맞았다고 주장하는 아들의 칭얼거림에 분기등천해 강미선(유선)을 몰아세우고 다그쳤다.
그는 “너희들만 힘드니 우리 세대 때는 안 힘들었는지 아니. 우리 때는 애들 셋, 넷 낳아 키우면서 시부모님 봉양에 시누이 시동생들 시집 장가까지 다 보냈어"라며 자신의 고난했던 과거를 끄집어냈다.
이어 “그리고 나는 남는 시간에 화장품까지 팔러 다녔다. 네 시아버지 알량한 기자 월급에 미국에 있는 네 시누이, 네 남편 학비 벌려고 나도 안 해 본 거 없어. 뭐, 너만 워킹우먼이었는지 아니. 나도 워킹우먼이었어. 하지만 난 다했다. 그게 내 의무인양 내 운명인양 군소리 안하고 다했어”라며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지 말고 알아서 다 하라고 강요했다.
슈퍼우먼의 삶을 강요당한 미선의 “그래서 행복하셨어요”라는 질문에 미옥은 “당연하지. 내 도리를 다 했으니까. 엄마로서의 도리, 아내로서의 도리, 며느리로서의 도리”라며 ‘여자의 도리’를 설파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희생해야 우리 대한민국의 초석이 다져지니까”라는 말로 왜 여자만 도리를 다해야 하냐는 미선의 울분에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미옥의 주장은 기센 시어머니의 극악함이라기에는 애잔하다. 사회가 규정해온 모성에 충실하게 살아왔음에도 아무도 애틋하게 봐주지 않는 노년의 억울함이 읽힌다. 그러나 그는 분풀이하듯 며느리에게 같은 방식을 강요함으로써 그의 주장과 달리 ‘여자의 도리’를 다한 삶이 ‘불평등의 세습’임을 증명했다.
베티 프리단은 그의 저서 ‘여성성의 신화’에서 미옥과 같은 삶을 ‘여성적 성취의 신화’로 규정했다. 그는 “여성성의 신화는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무의미한 갖가지 말들로 역할을 장식해왔다”라고 지적했다.
미옥이 카페에서 자신의 ‘품격’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목소리를 높인 ‘여자의 도리’ 주장이 애잔하게 들리는 것은 베티 프리단의 말대로 모성을 훈장이라고 세뇌해온 지난 과거에 대한 ‘공허함’ 때문이다.
전인숙은 사회가 절대가치로 여겨온 모성과 대치되는 삶을 선택했다. 전인숙은 6살 어린 딸을 시댁에 버리듯 맡기고 재벌가로 재가해 한 번도 딸을 찾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재벌가의 오랜 푸대접을 견뎌낸 끝에 결국 대표 자리에 오른 인숙은 자리를 누릴 겨를도 없이 갑작스럽게 알게 된 딸의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자 다시 한 번 과거와 동일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인숙은 딸과 데이트가 하고 싶었다며 강미리(김소연)을 불러냈지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학을 핑계로 한국을 떠날 것을 강요했다. 자신을 보는 미리의 건조한 눈빛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던 그는 회장 한종수(동방우)가 강미리와의 관계를 의심해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울분과 분노를 드러냈다.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겠다며 한 회장에게 직접 말하라는 박 이사에게 “난 몰랐어요. 세월이 얼마인데 알아봐. 여자 애들이 크면서 얼마나 바뀌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봐”라며 “몰라볼 수도 있지 않냐. 어미면 다 알아봐야 하냐”라며 절규했다.
인숙의 절망적인 외침은 베티 프리단이 지적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게 기득권 층이 보이는 편견과 편협, 그에 대한 성공한 여성의 강력한 방어기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혼한 이력이 있는 배우 주디 홀리데이를 향한 미디어의 평가를 언급했다. 해당 미디어는 주디 홀리데이에 관해 “비록 여성으로서는 실패했지만 배우로서는 거의 힘들이지 않고 성공했다는 것이 주디 인생이 보여주는 절망적 아이러니다”라고 썼다.
인숙과 주디의 사례는 여성은 여성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포기해야만 사회적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 사회 전반에 뿌리깊이 박혀있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인숙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당당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성공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 하고 있다.
그의 절규는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과 편협에 흔들리는 여성들의 심리적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는 현대사회가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공을 당연시하고 있음에도 페미니즘이 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 여성은 오랜 세월 길들여진 내면의 적인 ‘여성성’과 투쟁하고 있다. ‘세젤예’는 여성성의 상징인 모성을 통해 여성의 충돌하는 내면을 다루고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숙인 기자 news@fashionmk.co.kr/ 사진=KBS2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