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 문소리 "배우 문소리의 초심? 연기는 항상 처음" [인터뷰]
입력 2019. 05.21. 09:00:00
[더셀럽 안예랑 기자] 짧은 머리를 하고 판사석에 앉아 날카로운 눈을 빛낸다. 그 안에는 권력을 가진 자의 오만이 아닌 모든 걸 냉철하게 보고 판단하려는 이성이 자리했다. ‘배심원들’ 문소리는 재판장의 카리스마와 법조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캐릭터 안에 녹여냈다. 작은 표현으로도 모든 감정을 전달하고 사소한 장면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배우. 그게 바로 문소리였다.

최근 서울시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는 영화 ‘배심원들’(감독 홍승완)에 출연한 배우 문소리와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배심원들’은 2008년 처음으로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을 모티브로 존속 살해 사건의 유,무죄를 두고 평범한 8명의 배심원들이 각자의 상식대로 죄를 판단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문소리는 극에서 최초로 시행되는 배심원제도의 재판장을 맡게 된 판사 김준겸으로 분했다.

‘배심원들’은 기존 법정물과는 달리 판사, 검사, 변호사가 아닌 8명의 평범한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때문에 서로의 허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논쟁이 아닌 ‘싫어요’ 내지는 ‘모르겠어요’라며 시종일관 혼란스러워하는 배심원들의 상황에서 극이 진행된다.

“이런 법정 영화를 못본 것 같다. 경쾌한 소동극 같은 법정 드라마다. 새로운데 판사도 아니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게 변호사도, 피고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뛰어들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나가고 모두가 감동할 수 있는 순간을 만든다는 게 좋았다. 새로운 지점이 있다는 게 참 좋았다”

‘경쾌한 소동극’을 연상하게 만드는 장면은 ‘배심원들’ 곳곳에서 등장한다. 살인 사건의 죄를 판단해야 하는 재판장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아야 하지만 엉뚱하고 난감한 배심원들의 제안이 예상 밖의 결과를 내며 영화는 소란스럽고 유쾌하기까지한 소동들을 이어나간다. 김준겸이 권남우(박형식)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예상치 못한 상처를 입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다치고 뛰어갈 때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했다. 움직임이 강한 댄스 스턴트, 배심원의 동작, 양쪽 판사들의 반응들, 봉준호 감독의 ‘괴물’ 오마주처럼 풀밭에서 몰려오는 기자들. 그런 게 재미있더라”


영화는 평범한 8명의 배심원들의 대화로 구성되지만 문소리가 연기한 재판장 김준겸의 역할도 빼놓을 수는 없다. 비법대 출신으로 18년 동안 형사부 재판만 맡아왔던 강단있는 판사 김준겸은 원리원칙에 입각해 재판을 진행한다. 전에 없던 배심원들의 난감한 제안에도 흔들림 없는 카리스마와 소신을 내세우며 재판을 진행, 극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문소리는 재판장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직접 판사들을 찾아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시나리오에 나오는 세세한 부분들을 내가 법학과를 가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냐. 재판의 과정, 판사과 되는 과정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고, 개개인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도 들었다. 2008년이랑 지금이랑 법정에서 쓰는 용어들이 바뀐 부분이 있어서 그것도 공부를 많이 시켜주셨다”

재판과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 다음 문소리를 힘들게 한 것은 판사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판사라는 직업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20년 동안 법전을 들여다보고 재판을 해온 그들의 세월과 경험까지 따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였다. 문소리를 직접 만난 판사들은 ‘부장 판사 같다’는 한 마디로 문소리에게 연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것은 그 분들에게 ‘나는 당신들과 너무 많이 다르게 살았다. 연극하러 다니고 놀고 연애하고 그랬는데 내가 이 법전을 20년 넘게 들여다본 사람을 연기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 두렵다, 그런 느낌을 낼 수 있겠냐’ 했을 때 그분들이 ‘부장님 같으세요’ 이러더라. ‘저희 법원에 오시면 부장님이라고 할 것 같은데 왜 그러냐’고. 판사님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시작할 때 많은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무거운 법복을 입고 재판장 중앙에 앉아 배심원들과 피고인을 내려다보고 수많은 판단을 내려야 하는 판사 김준겸. 김준겸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재판을 끌고 나갔고, 때문에 문소리는 김준겸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의 판단과 고민을 외부로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은 캐릭터 안에 모든 것을 녹여내는 거였다.

“법복을 입고 있으면 조금 갇힌 듯한 느낌이 든다. 옷도 무겁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내면에는 큰 생각의 흐름들이 지나가고 있고 여러 생각을 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격하게 이것들을 안에서 굴리고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그런 것들이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인간적인 김준겸의 면모를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피고인의 딸을 챙기는 모습, 컴퓨터 바탕 화면 속 아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찰나에서 드러나듯이 김준겸은 냉정하지만 권위적이지는 않고, 이성적이지만 이기적이지는 않는 적정한 선을 지키며 영화 말미까지 김준겸의 인간적인 모습을 행동과 눈빛을 통해 드러냈다.

“첫 등장 때도 아침에 눈을 뜬 채로 세수하고 트렁크에 짐을 싸서 그대로 나온 가장 수수한 모습이었다. 프리 단계 때는 인간 김준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판사, 당신은 배심원’처럼 권력을 가진자와 없는 자로 간단하게 나누는 게 아니고 미묘한 지점들이 많았다. 인간 김준겸이 드러나야 해서 고민이 많았다. 영화는 1시간 40분 안에 이미지를 담아내야 되니까. 내 캐릭터는 다 녹여서 안에서 담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김준겸의 옆에는 김준겸을 옆에서 보좌해주는 두 명의 배심판사가 있었다. 문소리는 김준겸의 캐릭터는 혼자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호흡을 통해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배심원들’이 가진 매력이기도 했다. 8명의 배심원을 맡은 배우들이 캐릭터에 녹아들며 서로의 캐릭터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들은 배테랑 배우 문소리에게도 신선한 장면이었다.

“배심원들 8명은 정말 촬영 내내 한 옷을 입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지금도 그 풍경이 눈에 선하다. 늘 촬영장에 가면 이 옷을 입고 둘러 앉아 있고 다음날도 이러고 있다. 보기 좋았다. 여덟명이 서로의 연기와 캐릭터에 대해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었고 과정들이 한국 영화 현장에서 보기 드문 광경들이었다. 저는 배심원들만 촬영할 때도 있었는데 보기 좋았다. 저한테는 법조인들이 있었다. 배석판사가 양 옆에서 저를 적극 보좌했고, 작은 디테일이지만 판사들의 행동에 대해 재판 참관하면서 의견도 주고 받았다. 배우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참 고마워했던 것 같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내 캐릭터를 완성 시켜줬다”


그렇게 완성된 김준겸 캐릭터는 법조인으로서의 초심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전달하는 대미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캐릭터의 초심은 여러모로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1999년 영화 ‘박하사탕’으로 데뷔했고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아시스’(2002) ‘바람난 가족’(2003)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어배우는 오늘도’(2017) ‘배심원들’에 이르기까지 50편 가까이의 작품에서 문소리의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배우 문소리가 떠올린 자신의 초심은 ‘두려움’이었다.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됐다. 그때는 아무도 모르는 판에 혼자 들어가서 ‘어쩌면 모두가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조심스러웠고. 그런데도 그런 영화들을 한 걸 보면 잘 몰라서 용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내가 믿고 같이 일할 사람이 많으니 무서운 건 덜해졌다”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문소리에게 연기는 언제나 처음이었다. ‘배심원들’ 김준겸과 전작 드라마 ‘라이프’(2018) 오세화가 다르고, ‘배심원들’의 홍승완 감독과 데뷔작 ‘오아시스’의 이창동 감독이 다르듯 문소리에게 연기는 언제나 색다르게 다가왔다.

“어떤 시나리오를 받고, 어떤 인물을 어떻게 연기할지에 대한 것은 항상 처음이다. 이창동이랑 할 때랑 홍상수랑 할 때랑 박찬욱이랑 할 때랑 어떻게 같겠냐. 그런 지점에 있어서는 늘 너무 초심인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안정되면 너무 재미없어지고. 내 연기가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고 그렇다”

배우 문소리가 ‘배심원들’에 들어가기 전 했던 노력과 고민, 그리고 스크린에 담긴 결과물들이 이해되는 지점이었다. 문소리는 배우 뿐만 아니라 감독, 예능 ‘가시나들’ 속 출연진 문소리로서도 다채로운 처음을 이어갈 터였다. 이와 함께 문소리는 제작, 기획자 문소리의 처음도 기대하게 만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연출을 하고 싶다거나 감독으로서 하나의 필모를 쌓아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살다가 어떤 이야기가 있고, 이 이야기를 정말 하고 싶은데 그 연출을 다른 사람보다 내가 하는 게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할 것 같다. 흥행 감독이 돼야겠고, 칸에 가야겠고 이런 건 없다. 감독으로서보다 작가의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작가로서 출발을 해보고, 이 글이 책으로 나온 것보다 영화로 나오는 게 더 좋으면 그걸로 만들 거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기획이나 제작이나 그런 것들을 더 해보고 싶다. 친구들이랑 이런 아이템이 재미있겠다. 이런 걸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런 걸 재미나게 해보고 있는 중이다”

[안예랑 기자 news@fashionmk.co.kr/ 사진=CGV아트하우스,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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