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복싱선수처럼” 엄태구, ‘판소리복서’로 다시 쓴 매력 [인터뷰]
- 입력 2019. 10.24. 16:06:23
- [더셀럽 김지영 기자] 링 위에서 움직이는 몸놀림이 현란하다. 탈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택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재빠른 속도와 정확한 포즈로 훅을 날린다.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가지가 영화 ‘판소리 복서’에서 만나 묘한 매력을 발휘하고 이를 배우 엄태구가 살려냈다.
최근 개봉한 ‘판소리 복서’는 정혁기 감독의 단편 ‘뎀프시롤: 회고록’에서 출발했다. 복싱에 판소리를 결합한 새로운 복싱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회고를 한다는 짧은 내용이 담겨 있는 ‘뎀프시롤: 회고록’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이라는 주제를 더해 지금의 ‘판소리 복서’가 탄생했다.
다이어트 복싱이 아니면 더 이상 찾지 않는 복싱 체육관, 동네를 재개발하려는 움직임,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의 보급으로 외면 받고 있는 카메라 필름, 펀치드렁크 증상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병구(엄태구)의 기억 등이 영화의 주제를 이야기해 극이 더욱 의미 있게 완성됐다.
극의 주인공인 병구는 어린 나이에 챔피언으로 등극했다가 도핑의혹으로 잠정 은퇴했다. 잠시 흔들리는 시기가 있었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복싱에 도전한다. 2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 도핑전적으로 복싱선수 복귀의 길은 병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링 위에 오르지만 여느 스포츠영화처럼 멋있게 우승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극 중 병구는 여러 예능에서 주변 배우들이 언급한 엄태구의 모습과 닮아있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복싱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박관장(김희원)에게 말할 때도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고 허락이 떨어지자 소심하게 기뻐한다. 이외의 모습 또한 엄태구가 작품에선 보여주지 않았던 진솔한 면모라 더욱 웃음을 자아낸다.
엄태구는 단편 ‘뎀프시롤: 회고록’ 때부터 팬이었다고 밝혔다. 생소한 소재인데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고 또 한편으론 눈물을 짓게 만드는 묘한 매력에 끌렸다. 그러던 중 장편 시나리오가 엄태구에게 들어갔고 그는 자신이 느꼈던 기분을 관객들도 공감했으면 하는 마음에 출연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남아있었다. 단편에서 활약한 조현철 배우가 장편을 이어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었고 정혁기 감독이 걱정을 잠식시켰다.
“출연 문제를 두고 감독님을 찾아 갔을 때는 감독님만 계셔서 얘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사실 단편에서 조현철 씨가 너무 잘해주셨고 캐릭터가 대단해서 조현철 씨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병구를 맡을 자신이 없다는 것보다는 관객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여쭤봤더니 감독님이 저에게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도전을 했다.”
영화는 병구가 복싱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박관장에게 말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엔 병구의 수많은 노력 끝에 링 위에 오르는 서사로 이어지며 병구에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잠깐의 회상으로 비춰진다. 특히 영화 촬영은 극 전개의 순서대로 찍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엄태구는 병구의 서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감정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감정선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매 신을 찍을 때 제일 크게 생각하는 것이 극 중 전 상황이었다. ‘병구가 전에 뭐했지?’를 가장 크게 생각했었다. 감독님이 좀 더 디렉션을 주시면 덧붙인다든가 그런 식으로 항상 접근했다.”
엄태구는 복싱 챔피언까지 달성한 병구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복싱 연습에 쏟아 부었다고 밝혔다. 실제 복싱 선수들처럼 연습을 하고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연습을 했다고 설명했다. 복싱을 하는 척, 복싱을 잠깐 연기하는 연출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리얼리티를 추구한 셈이다.
“코치님과 목표를 높게 잡고 연습을 시작했다. 병구의 복싱 자세가 진짜 같고 전직 프로복서와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목표로 촬영 전까지 최선을 다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선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저는 복싱 선수들에 비해 짧은 기간 연습을 했지만 정말 힘들더라.”
실제 복싱 선수들과 비교해도 흠잡을 데 없는 포즈, 날렵한 움직임에서 끝이 아니었다. 판소리와 결합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판소리 복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현해야 했고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세를 준비했다.
“대본을 봤을 때부터 판타지로만 있는 판소리 복싱이 아니라 실제로 복싱경기를 할 때도 승(勝)을 거둘 수 있도록 자세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첫 목표였다. 실제로 동작을 하면서 실전 경기에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동작들은 제가 혼자 복싱 기본 동작으로 이것저것 해보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만들었다.”
자진모리장단, 휘모리장단 등과 어우러져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나풀거리는 나비를 연상케 하고 훅을 날릴 땐 벌과 닮았다. 탈춤의 기본동작, 택견의 팔과 발동작 등에서 차용한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처음 판소리 복싱을 접했을 땐 웃음이 설핏 터지지만 금방 매력에 빠져든다.
“택견, 탈춤 등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하면서 만들었다. 보는 분들이 말을 해주긴 했다. 택견과 탈춤 등과 비슷하고. 그렇게 보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 보다는 주어진 한 신,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진실 되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펀치드렁크로 계속해서 지워지고 끊기는 기억, 흐릿해져가는 과거. 그럼에도 병구는 프로복서로 재 데뷔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박관장이 반대하고 교환(최준영)이 욕을 함에도 신념을 잃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민지(혜리)의 도움으로 자신감을 충족한다. 도핑으로 은퇴했다가 다시 데뷔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병구 역시 모를 리 없다. 잊혀져가는 것들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는 병구의 모습이 막연한 꿈을 붙들고 있는 듯 하나 결국 이뤄내는 병구를 통해 영화는 극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연기를 계속 하고 있는 게 막연한 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니까. 매 작품이 저에겐 도전이기도 하고. 잘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는 것도 병구와 비슷한 것 같다.”
특히나 배우,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대중들에게 새롭게 각인되고 또 지워지는 것이 반복되는 직업 중 하나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대중의 인식에 지워져버릴까 걱정하고 염려한다. 이 때문에 SNS로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을 하는 것도, 최근 유튜브로 전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며 ‘사라지는 별’로 지워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저는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에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라는 극의 대사가 온몸으로 와 닿고 깊게 박히는 느낌이다. 어렸을 때부터 키우던 강아지, 나이 많이 드신 부모님 등 이런 것들을 사라져가는 것들로 받아들이면서도 두렵기도 하지만 나도 사라져 갈 것이다. 생각이 많아지긴 한다. 결국 다 사라지는 게 사실이지 않나.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배우로서 사라지는 것에 걱정을 하고 있는 것보다는 사람 엄태구가 훗날 사라질 날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이는 또 대중에게 어떠한 이미지로 각인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엄태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었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 생각은 많이 안 해봤다. 제가 엄청 좋게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좋게 기억됐으면 좋겠다. 좋게 기억되는 것이 연기 잘하는 배우이지 않을까. 직업이다 보니까. 잘해내야 하고 잘 하고 싶다. 지금은 그렇다.”
[더셀럽 김지영 기자 news@fashionmk.co.kr/ 사진= CGV아트하우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