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정 “‘69세’, 진정으로 용기 낼 나이” [인터뷰]
- 입력 2020. 08.24. 16:36:33
- [더셀럽 김지영 기자] 영화 ‘69세’ 속 효정은 심지가 굳고 강한 인물이다. 주변의 오해와 편견들에 굴하지 않고 가해자를 대면하는 순간에도 불안하거나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설사 가해자가 떠난 뒤 안도하는 한숨을 내뱉을 때 티 내지 않으려 했던 긴장이 드러날지언정, 효정은 굳세다. 배우 예수정은 그런 효정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69세’는 70살을 앞둔 노인 효정이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20대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다. 다소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에서 막이 오르는 ‘69세’지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어두운 분위기로만 흐르지 않는다.
중호를 고소할지 고민하던 효정은 정신적 지주이자 동거인 동인(기주봉)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함께 경찰서로 향한다. 경찰을 비롯해 대부분이 효정을 치매로 의심하고 가해자인 중호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며 효정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계속되는 구속영장 기각에 효정은 무너질 듯 하지만, 동인의 무너지지 말라는 응원에 다시 일어선다. 그러곤 세상에 고발문을 날린다. 다소 불쾌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라고.
인생의 비극적인 일을 겪게 된 날 효정은 멍하니 병원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나 극의 말미 말끔하게 차려입고 단호한 표정과 밝아진 표정으로 병원 옥상에서 고발문을 두고 올 때는 사건의 초반과 달라진 효정의 모습을 나타낸다. 효정이 일련의 상황들을 겪게 되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끝까지 싸워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수정은 그런 효정을 더없이 잘 표현해냈다. 옥상에서 넋이 나간 표정, 동인에게 고백하기 전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 고소하기로 한 뒤 고백했을 때,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순간, 우연히 중호를 다시 만나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라며 직설을 내뱉는 모습까지 효정의 다양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냈다. 특히 차분하고 나긋하게 말하던 그가 중호와 대면했을 땐 내면의 분노까지 터져 나오는 모습으로 관객이 더욱 영화에 빠져들게, 그리고 효정의 감정을 여실히 잘 느낄 수 있게끔 했다.
예수정은 임선애 감독의 캐스팅 1순위 배우였다. 임선애 감독은 예수정에게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건넸고 예수정은 큰 고민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그는 ‘69세’가 다소 어려운 소재를 다룬 것보다 시나리오가 탄탄해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소재 자체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아니다. 픽션이라 생각해서 물어봤더니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하셨다. 감독님도 하셨던 말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소수, 약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과장 없이 잘 그려졌고 당한 자의 얘기보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사회의 시선들이 기가 막히더라. 그런 점에서 사회성이 높다고 생각을 했다. 구성 하나하나가 다른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효정이 자기 방식대로 헤쳐나가고 있는 그런 구조가 좋았다. 여러 장점으로 하게 됐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69세’는 큰 파동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임선애 감독이 의도적으로 담담하게 연출하려고 한 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예수정이 효정을 더욱 차분하게 그려냈다. 임선애 감독과 예수정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 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오히려 관객은 효정의 아픔이 뼛속까지 아려온다.
“저는 물론 분노한다. 그런데 69년을 살아온 만큼 효정은 이 사회의 무례함을 얼마나 당해왔겠냐. 보호받지 않는 입지에서 얼마나 무례함을 당해왔을 것이며 상당히 많이 삼켰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 숨을 삼키기도 했을 것이고. 그래서 분노가 없었던 게 아니라 너무 많이 당해왔고 숨죽여 살아왔을 때문일 터다. 그리고 효정은 소수이자 약자기 때문에 힘든 인물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동인에게서도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그 정도의 정신력이면 순간적으로 버럭 하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지 숙고하여 내린 다음 행동하는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정은 임선애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보고 먼저 만나자고 제의했고 극의 말미 효정의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예수정의 설명을 듣고 수정한 대본이 지금의 ‘69세’ 결말이다. 극 초반부터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그려진 효정이 극의 말미에서 가장 효정다운 선택을 하게끔 도운 것이다. 예수정은 이 외에 효정의 결은 바뀌지 않았다고 밝혔다.
“크게 바뀔 것이 없었다. 이미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걸 어디서 느낄 수 있냐면 먼저 동인에게 신고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다. 자기가 신세 지어서 살지만, 친구로서 또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주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을 쓰지 않고 각방을 쓰고, 치약마저 따로 쓰며 형편상 얹혀살고는 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돕는다는 것 등에서 효정의 성격이 드러난다. 다만 거기서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69세인 만큼 한 발짝 더 나가는 용기를 낼 수 있는 나이인가다. 69세는 진정으로 용기를 낼 나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정은 아직 겪어보지 않은 69세를 용기를 내야 할 나이,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바닥으로 주저앉기 쉬운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효정을 더욱 강인하게 표현하려 했고 신세지지 않으려고, 폐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효정의 성격에 신경을 썼다.
계속해서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동인을 떠나 다른 삶을 살려고 했던 효정이 동인의 말로 하여금 용기를 다시 내기 시작한다. 그러곤 연락을 끊고 살아왔던 딸을 몰래 찾아가 손녀와 통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효정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동인의 포기하지 말라는 말, 자신이 겪은 피해는 본인 세대에서 끝내고 싶은 뜻이 오롯이 전해진다.
“기막힌 일을 당했을 때 감정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있고 느닷없이 뇌에 공기가 통하듯 정신이맑아지는 경우도 있다. 중호를 대할 때와 고발문을 옥상에 두고 오는 효정의 행동은 가장 효정이 할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이면 다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지언정, 한 발을 내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어딨어’ 하면서 망설일 수도 있는데 임선애 감독은 한 발 내디뎠다. 사실 한 인물이 있어도 있는 것인데 ‘그런 게 어딨냐’고 지우지 않나. 많아야 ‘있다’고 하고. 임선애 감독은 한 발을 디뎠을 때 느닷없이 다가오는 자기 스스로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영상으로도 잘 표현했다. 그게 배우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스며드는 정서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에 정서가 많이 침범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20대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재로 ‘69세’는 개봉 후 일부 세력들에게 평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효정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는 법원처럼 ‘말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예수정이 말한 것처럼 이는 전혀 없는 경우가 아니며 사회에서 대두되지 못하는 노년 성폭행 문제일 뿐이다. 영화는 성폭행 문제뿐만이 아니라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는 시선, 비난을 일삼는 태도 등도 함께 꼬집는다.
“저는 알아서 욕먹지 않으려고 소박하게 입고 다닌다. 작품 속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시 받지 않으려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이다. 사실 사회에서 옷을 잘 입고 다녀도 도마 위에 오르고 못 입어도 욕하지 않나. 여러 가지로 이상한 면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없어지리라 본다. 그게 다 우리가 한가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않나. 한가할 때는 비판할 게 많아진다. 보이니까. 스스로 바쁘고 자기 삶에 집중하고 있을 땐 남이 뭘 입든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도 없을뿐더러 노년을 다루는 영화도 턱없이 적다. 예수정은 대한민국이 노령사회로 접어드는 만큼 노인을 소재로 한 영화도 앞으로 늘어나지 않겠냐며 긍정적인 흐름을 기대했다.
“앞으로 많아질 것이다. 노년이 많아지니까 이런 고찰을 다룬 영화가 많아지지 않겠나. 구성원을 알아야 사회를 대처해나가고 사회와 대중매체 사이에서는 주고받으면서 성장해야 변천해 나가지 않겠나. 아마 알 수는 없지만 많아질 것이다. 몇몇 작품들에서 잘 그려지길 시작하면 우리 일반 시민들이 고마울 것이다.”
예수정은 최근 개봉한 ‘침입자’를 비롯해 ‘82년생 김지영’ ‘허스토리’ ‘신과 함께-죄와 벌’ ‘부산행’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WWW’ 등에서 출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를 소화해왔다. 매 작품마다 다른 이미지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다가도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로 놀라움을 선사했다.
“캐릭터를 잘 소화하지는 않고 노력한다. 우리 숙제인데 어떡하나.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들도 많이 있을텐데 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작품을 잘 읽어내고 작품에서 역할이 가는 방향을 좀 더 세심하게 짚어내는 편이다. 요새 누가 배우 보러 오나. 작품 보러 오지. 거기에 위안을 가진다.”
연기 열정이 가득한 예수정은 여전히 역할을 맡을 때마다 캐릭터에서 배우는 게 있다고 밝혔다. 그는 스스로 무명이라고 소개하고 무명의 길을 나아가는 자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가 꿈꾸는 어른은 어떤 모습일까.
“대단한 거 없고 그저 덜 주책 부리면서, 덜 피해 주면서 살고 싶다. 진짜 유기체적으로 그런 힘이 없어졌을 때는 큰 존재의 관대함 속에 하루 속히 소멸 되기를 원할 뿐이다. 연극 대사 같다고? 삶이 연극이라고 하지 않나.(웃음)”
[더셀럽 김지영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주)엣나인필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