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애 감독이 데뷔작 ‘69세’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인터뷰①]
입력 2020. 08.31. 16:36:12
[더셀럽 김지영 기자] 보통 연출을 시작하는 감독은 자신과 가까운 이야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시나리오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임선애 감독은 마음속 한편에 고이 뒀던 사회문제를 데뷔작으로 꺼내놨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인 성폭력 문제와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영화 ‘69세’다.

최근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인식이 변화되어가고 있다. 가볍게 넌지시 던지는 말조차 상대방에게는 희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과 호의가 담긴 행동, 눈빛마저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 이와 함께 국내에선 과거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투운동(성범죄 피해 사실을 밝히는 캠페인)이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데 한몫하고 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미투운동과 성범죄 인식의 변화 운동에도 외면받는 곳이 있다. 노인 성폭행이다. 최근에도 국내에서 할머니만 상대로 5건의 성폭행을 일삼은 용의자를 체포했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심심찮게 비슷한 사건들을 다룬 기사들을 여러 건 접할 수 있다. 그만큼 영화 ‘69세’는 단순히 허구에서만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란 뜻이다.

임선애 감독 또한 과거 한 기사를 보다가 알지 못했던 범죄 사각지대를 알게 됐고, 수년 뒤 시나리오를 작업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해당 기사가 떠올랐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라면 자신이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고, 자신의 영화로 가해자에게 ‘사각지대일지라도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 임선애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성범죄를 당한 노인 피해자는 가족 중심의 사회로 인해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해 범죄 사실을 잘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과 주변에 작은 일일지라도 여성 99%가 성범죄 피해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한 칼럼 기사를 보고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해 스크랩을 해뒀었다. ‘사회가 여성 노인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가해자의 타깃이 된다’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 칼럼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도 노인 피해 성범죄가 수치로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 노인 피해자는 성범죄를 재차 당함에도 신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쉬쉬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가해자들에게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작하게 됐지만 막상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의견을 묻기 위해 여자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을 하면 99%가 성범죄 피해 경험이 있더라. 여전히 지금도 가끔 일상 속 공포를 경험하며 사는데 69세면 겁이 완전히 없어질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고 쓰기 시작했다.”

임선애 감독은 자신이 용기를 가지고 쓴 시나리오가 영화관에 걸리기까지에도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그중에서도 정부와 지자체의 제작지원을 받은 것을 꼽았다. 잘 쓰여진 시나리오라는 것도 한몫했겠으나, 미투운동으로 용기를 낸 여성들이 있었듯이 영화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더라. 그게 아마 미투운동 이후인 것 같다. 누군가 용기 내서 숨지 않고 발언을 했을 때 그 용기를 받아서 또 다른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지 않나. 성폭력 피해를 다룬 영화들은 많았지만, 나조차도 잘 몰랐던, 사각지대에 있었던 노인 성폭력 이야기를 누군가는 수면 위로 올려야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성폭력 피해 범죄 사실뿐만 아니라 사회 취약계층에 대해서 차별과 편견, 시선, 이런 것들을 좀 꺼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임선애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최대한 멀리, 개인적 경험담과 거리가 먼 작품으로 ‘69세’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완전히 상관이 없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효정의 이야기 속에 여성과 남성, 노년의 인간의 존엄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보통 영화 감독들은 단편에서 자기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장편을 써야겠다고 다짐했을 땐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사실 이 작품 외에 다른 작품을 쓰고 있었는데 잘 안 풀려서 ‘69세’를 작업하긴 했다. 아마 운명이지 않았을까. 제 안에 뭔가 응축돼있었던 폭력에 노출된 경험을 이야기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 발(足)로 쓴다는 말이 있지만, 취재력이 너무 높아지면 내가 아는 걸 모두 담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취재하다가 멈췄다. 실제와 비슷한 사건을 영화로 재현하는 걸 지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놉시스나 예고편을 본다면 자극적인 로그라인으로 읽힐 수 있지만, 여성이건 남성이건, 노인이건 다 존엄함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최근 개봉한 ‘69세’는 노인 효정(예수정)이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29세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효정의 동거인 동인(기주봉)만이 그의 힘이 되어주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고 효정 역시 무너지는 듯 하다 다시 일어나 세상에 다시 외친다.

효정이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으로 시작하는 ‘69세’는 아무런 영상 없이 음성으로만 막이 오른다. 불 하나 없는 깜깜한 극장에서 중호의 노골적인 접근, 이를 최대한 막아내고 거절하는 효정의 애처로움이 관객의 귓가를 파고든다. 임선애 감독은 이러한 연출을 시나리오 작업 당시부터 생각했던 연출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흑백 화면 연출로 효정의 고립감, 공포를 관객이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과 혹시라도 연출이 곡해되는 우려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너무 불만이 많았다. (성폭행 피해자들의 고통이 전시로 치부 된)몇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장면을 보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불편함밖에 없다. 그게 과연 리얼리티일까. 리얼리티를 위해서 그래야 하나. 어차피 실제를 다뤘기 때문에 공분할 수 있고 장면을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굳이 그 장면을 본다고 우리가 더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그런 노출을 자제하려 했고 피해자의 고통이 전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시놉시스만 봐도 영화의 분위기가 예상되나 ‘69세’는 지금껏 봐온 영화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가해자를 구속 시키려 법정 싸움을 하지도, 피해 입은 주인공이 변호사 혹은 경찰과 같은 제2의 인물에게 도움을 받지도 않는다. 오로지 피해자인 효정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이 색채다. 성폭행을 당한 후 삶의 의지를 잃은 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효정, 수영장에서 익사한 듯 힘없이 떠다니는 모습에서도 활기가 없는 모습을 빛바랜 푸른 색이 표현한다. 이 외에 계속되는 구속영장 기각에 힘을 잃어가자 어두운 분위기로 영화가 이어지고 효정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는 동인은 빨간 머플러와 붉은 색상의 의상으로 어두침침한 효정의 색상에 활력을 더한다.

“효정은 푸른 물, 수영장의 이미지를 생각했다. 첫 장면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시체처럼 떠가는 장면을 생각했다. 극 중 효정은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살아왔지만 세세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인물이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결국 인간이다 보니 힘들어하는 지점을 수영장에서 떠 있는 모습으로 상상했다. 포기하려고 했던 인물이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종의 아날로그적인 해시태그라고 생각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인물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잘 갖춰 입고 세상에 던지는 것이다. 그런 효정의 이미지가 중요해 푸른 계열의 톤, 동인은 붉은 적색의 따뜻한 이미지로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 얕게 그려지는 효정의 전사는 얼마나 그가 고되게 살아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딸이 있으나 어떠한 이유로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 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처지로 동인의 집에서 쉐어를 하고 있다. 동인의 집에서 나오자 갈 곳이 없어진 효정은 과거 상처를 입었던 재가 요양보호사로 돌아가 어쩔 수 없이 일을 다시 시작한다. 효정과 마찬가지로 동인의 전사가 얕게 그려지지만 대충 예상만 하게 할 뿐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영화는 두 노인의 성장기라고 볼 수 있다. 효정만이 아니다. ‘세상에 동인 같은 남자가 어딨어’라고 하지만 영화에서도 그려지지 않나. 동인도 가정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이다. 효정에게 의사를 구하지도 않고 고발문을 들고 가는 것도 가부장적인 태도로 볼 수 있다. 나만이 할 수 있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부분들. 동인과 효정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서 노인 스스로 깨우쳐서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노인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그리고자 했다.”



임선애 감독은 노인 중심 영화를 만들면서 또 하나 주의하는 점이 있었다. 가족 중심의 이야기를 하는 기존의 노인 영화와 다른 결을 그리고자 했다. 효정이 과거에 어떠한 일을 겪었든 간에, 현재의 삶에 집중하고자 한 계산이다.

“보통 노년을 다룬 영화를 보면 가족 중심 영화다. 성폭력만 해도 피해자가 있는 가족 구성원의 스토리가 중심이 된 이야기를 많이 봤다. 비슷하게 답습되는 게 싫었고 더 독립적으로 두 사람을 위주로 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배제했다. 주인공의 전사를 표현한다고 한들, 지금 69세의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고통이 있고 겉으로는 안온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지만 속에는 꺼내 보이기 싫은 게 있지 않나. 하나하나 건드리다 보면 중요하게 얘기하고 싶은 내용은 하지 못하는 주객전도 상황이 올 것 같았다. 효정을 친근하게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고. 효정이 다시 용기를 내서 세상에 고발할 수 있을까, 그는 누구에게 용기를 얻어서 스스로 어떤 깨달음으로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줄거리만 들어도 공분하게 되는 내용을 ‘69세’는 철저하게 일정한 톤을 지킨다. 동인이 옆에서 대신 화를 내주지만 이마저도 신사적이고 피해자인 효정은 모든 고통을 한 번 삼키고 난 뒤 토하는 숨으로 이야기하듯 차분하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담담하게 그린 이유에 오히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기 싫었다”고 답했다.

“제가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지만, 거기에 예수정 선생님의 생각과 바라보는 시선으로 한 스푼 더 올라간 느낌이다. 저는 담담하게 그리고 싶었던 것이 맞다. 단순히 고통을 감내, 인내하기보다는 우리가 아주 슬픈 소식을 접했을 때도 배가 고픈 건 고프고 어떤 장면을 보고 웃음이 나지 않나. 효정과 동인이 경찰서 민원실에 고소하러 갔을 때도 그렇다. 대기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우울하고 침울한 게 아니라 서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눈치를 보는 그런 상황. 또 가끔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않나. 어떤 사건에서 피해자의 사생활이 드러나면서 ‘어떻게 피해자가 이럴 수가 있냐’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왜 자꾸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나.”

인터뷰②로 이어집니다

[더셀럽 김지영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 (주)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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