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 이정은, 한계가 없다는 것 [인터뷰]
입력 2020. 11.16. 17:03:03
[더셀럽 전예슬 기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말이 없는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눈빛, 표정, 심지어 글씨체만으로 역할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변화무쌍한 연기로 매번 한계를 뛰어넘는 배우 이정은의 이야기다.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접점이 없는 세 여성이 연대와 교감을 통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온기의 손길을 건넨다. 그러나 전반 전개가 길어지는 탓에 이들의 감정을 읽어내고, 과정에 도달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는 ‘늘어진다’라고 할 수 있지만, 이정은은 그래서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기감정을 잘 추스르고 결정할 수 있는 건 행복한 거예요. 감정이라는 게 널뛰는 거라 꼬리가 안 잡힐 때가 있잖아요. 그때 사람이 당황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해요. 일을 잡고 살던 사람들이 감정 정리가 되지 않을 때를 ‘위기’라고 생각해요. 절벽에 있는 느낌이 들죠. 그런 기분을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한국에서는 호흡이 느린 영화를 만들어내는 걸 자신 없어 해요.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줄 수 있는 영화로 남았으면 하죠. 저는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들과 다르게 파도가 높지 않고, 수면 아래 있는 감정을 느끼는데 공을 들였어요. 공생이라는 문제가 있잖아요. ‘기생충’이 공생의 문제를 제안했다면 이 영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후시 녹음까지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감독님의 작품에 최선을 다해 힘을 실으려고 했어요. 감독님도 지구력으로 버텨오면서 결과물을 만드셨죠. 어떤 장면의 아쉬움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작업했던 것에서 최상의 것들을 뽑아냈다고 생각해요. 이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하는 순간이죠.”



제목만 본다면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임을 예측하지만 ‘내가 죽던 날’은 철저한 ‘힐링 드라마’ 장르다. 사건 이면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는 것.

“시나리오를 받기 전, 작업 중일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시나리오를 읽기 전엔 눈만 뜨면 다시 살아가는 코미디인 줄 알았죠. 하하. 시나리오를 받고, 지나와 생각하니 사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어쨌든 살아있어야 위로도 받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니까요.”

이정은은 극중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 순천댁 역을 맡았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온 그는 섬마을에서 조용히, 존재감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진(노정의)과 현수(김혜수)를 마주하면서 삶의 변화를 겪는다. 목소리 없이 작은 몸짓과 표정만으로 인물을 설명하고, 모든 감정을 전달해야 했기에 표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순천댁은 이상적인 인물이잖아요. 불행을 딛고, 남에게 용기를 준다는 게. 그런 역할이 저에게 오는 게 ‘과연 나는 그런 사람인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저와 순천댁이 유사한 점이 있다면 잘 듣는다는 것이었죠. 듣는 귀를 유지할 수 있어야 극 속에서 이상적인 역할에 다가갈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말을 하는 게 부담될 때도 있어요. 그런 시기에 이 작품과 순천댁을 만났죠. 연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시도하고, 시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건 스스로 만족되는 부분이에요. 결과물은 평가를 받아야겠지 만요. 말이 없는 사람의 역할은 액션과 리액션이 중요하구나를 알았어요. 잘 듣고 발음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말을 안 할 때 모습은 모니터링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되도록 힘을 빼고, 받아들이려 했죠.”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대학로에서 잔뼈 굵은 배우다. 30년 무명을 견디고 ‘미스터 션샤인’ ‘눈이 부시게’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 드라마를 통해 빛을 보기 시작했다. 특히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제를 휩쓸며 그 연기력을 다시 한 번 입증하기도. 그러나 ‘연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 하냐’라는 질문에 “아직 배워나갈 게 많다”라고 겸손함을 내비친 그다.

“그런 말에 ‘으쓱’하다가 주말드라마를 할 때 완전히 무너졌어요. ‘평범한 연기는 언제 할 거냐’라는 댓글을 봤죠. 일주일 동안 고민을 했는데 지금 당장 극복하진 못할 것 같아요. 지금도 고민 중이고요. 고두심 선생님이 연기할 때 보면 평범한데 힘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 배워나갈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말들이 더 잘 들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기생충’ 이후 일상으로 내려놓으려 노력했어요. 제가 맡았던 역할은 표정이 과한 게 많았거든요. ‘내가 죽던 날’에선 굉장히 힘을 많이 빼고, 두드러지는 행동을 안 하려고 감독님에게도 덤덤하게 표현하고 싶다고 계속 여쭤봤어요.”

‘내가 죽던 날’은 용기와 위로를 전하기도 하지만, ‘참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질문에 이정은은 ‘겸손’과 ‘경청(傾聽)’이라고 답했다.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밝게 유지하는 게 큰 힘이 돼요. 시간을 쪼개 만나는 게 천운인데 계속 찡그리면서 작품을 할 순 없잖아요. 몰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외에는 동료애를 발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죠. 제가 연출부 출신이다 보니 그런 게 잘 보이더라고요. 천운 같은 운명의 만남이 잘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뒤늦게 인지도를 얻었기에 주변에 여쭤 봐요. 경솔하거나 으쓱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때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에 있어서는 부끄럽지 않죠. 그런 점들을 솔직하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또 좋은 어른이란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른이면 자꾸 말을 많이 하고, 가르쳐주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 걸 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좋은 어른이지 않을까 싶어요.”

[더셀럽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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