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 “정약전, 피 토하며 썼을 ‘자산어보’” [인터뷰]
입력 2021. 04.14. 07:00:00

'자산어보' 설경구 인터뷰

[더셀럽 전예슬 기자] “데뷔 후 첫 사극 도전”이란 말이 믿기지 않는다.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 속 정약전으로 완벽하게 분한 배우 설경구다.

1993년 연극 ‘심바새매’로 데뷔한 설경구는 그동안 숱한 작품에 출연하며 여러 얼굴을 보여줬다. ‘자산어보’를 통해 처음으로 사극 장르에 도전했다고 밝힌 그이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온다. ‘자산어보’는 그에게 ‘운명’이었던 작품이었던 것일까.

“이준익 감독님을 한 영화제에서 오랜만에 뵀어요. 작품을 하실 때 된 것 같아 느닷없이 냅다, ‘책 주세요’라고 했죠. 마침 사극을 쓰고 계셨어요. ‘저 사극 안 해 봤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리 중이라 뭐라 말은 못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 저에게 바로 책이 왔고, 그게 ‘자산어보’였어요.”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역사 속에 숨어 있던 신분도, 지향점도 달랐던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를 조명한다.

“한 번에 확 감정이 온 건 아니고, (시나리오에) 젖어 들며 눈물을 흘린 경험은 있어요. ‘자산어보’에는 큰 사건이 없어요. ‘신유박해’라는 큰 틀의 사건은 흑산도에 들어온 배경 때문에 설명됐던 거고, 서학이라는 이야기도 없고, 흑산도에 들어와 주민들과 같이 섞이며 살고, 지내면서 그려진 소소한 이야기죠. 젊은 친구 창대가 글을 좋아하고, 글을 배움으로써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욕망은 젊은 세대의 당연한 이야기인 거죠. ‘자산어보’는 비극이 아닌, 희망이 있는 영화라 생각해요. 소소한 것으로 만들어낸 자체가 즐거운 기억이고, 소중한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설경구가 분한 정약전은 성리학 사상을 고수하는 다른 양반들과 달리 열린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학문적 수양보다, 사물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는 정약전은 백성을 위한 지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찰한다. 창대를 만난 후 서로가 가진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는 정약전의 모습은 당시 신분 질서가 강했던 사회에서 그가 가진 열린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정약전을 설경구는 어떻게 해석하고, 연기하려 했을까.

“약전에 대해 많이 모르실 거예요. 남긴 책도 ‘자산어보’와 ‘표해시말’ 정도죠. 약전이란 인물은 그 시대 정말 위험한 인물이었어요. 양반, 임금까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꾼다고 했잖아요. 정말 위험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죠. 영화에서도 나오다시피 약용보다 약전이 위험한 인물이에요. 한편으로 약전이 책을 못 쓰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봤어요. 약전도 굉장히 천재적인 학자라고 생각하는데 그 시대 관료들이 갖춰야할 지침서를 쓰지 않았죠. 어류, 생물에 대해 파는 이유는 사상을 글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어요. 약전의 사상이 책으로 나오면 동생까지 위험에 처하니까. 책을 쓰지 못했던 내면의 아픔이 있었을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인물이라 이해하며 촬영했죠.”

영화 ‘해운대’ ‘소원’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살인자의 기억법’ 등 장르를 불문하고 압도적인 열연을 펼쳐왔던 설경구. 데뷔 29년 만에 첫 사극 영화에 도전한 그는 앞서 언론배급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다시 한 번 사극에 출연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극만의 매력은 제가 안 가 본 세상에 대한 매력인 것 같아요. 과거지만 궁금하고, 그 시대를 사는 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해보기 때문이죠. 물론 ‘자산어보’의 경우, 신유박해 외에는 거의 창작 작품이에요. 다른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한 건 큰 사건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어가 창작자의 생각과 실제의 사건이 충돌하며 파생되는 글을 표현하면 어떨까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컬러로 해보고 싶어요. 대신 퓨전 사극 느낌이 아닌. 뭔가 ‘조선’이라는 색감과 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걸 잘 살리는 사극을 수련해보고 싶은 거죠.”

정약전과 신분, 세대를 초월해 서로의 지식을 나누며 ‘벗’이 되는 창대 역엔 변요한이 캐스팅됐다. 서로 다른 신분과 가치관으로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과정은 영화의 큰 관전 포인트다.

“눈이 너무 좋아서 ‘눈이 참 좋다’라고 변요한 배우에게 얘기한 적 있어요. 그 친구가 낯을 가리는데 숫기 없는 모습이 저랑 비슷하더라고요. ‘미생’부터 ‘미스터 션샤인’까지 얼굴이 참 좋았어요. 반항기도 있는 것 같고, 그런 모습들이 창대랑 닮아있는 것 같았죠. 저의 선한 눈빛과 닮아있기도 하고. 그래서 감독님에게 추천했어요. 감독님이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연락했는데 변요한 배우가 하겠다고 해서 좋은 인연이 된 거죠. 변요한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솔직한 사람이고요. 없는 말 안하고, 살 붙여서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밖에 못하는 사람이죠. 제가 알게 된 변요한은 그게 매력적이었어요. 자기 의상이었던 누더기와 거친 얼굴을 좋아하고, 이를 하얗게 드러내 웃으면 천진난만한 섬 사람 같더라고요. ‘자산어보’를 너무 좋아했어요. 다음 작품에 고민이 될 정도라며. 자기 촬영이 끝나고도 계속 현장에 있었어요.”



‘자산어보’는 1814년 정약전이 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 등을 채집해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서적이다. 그림 없이 세밀한 해설로 수산 생물의 특징을 서술한 ‘자산어보’는 해양 자원의 이용 가치와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자산어보’는 학식과 명망이 높은 학자 정약전이 창대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서적이란 점에서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의 관계가 함축돼 있어 의미가 더 크다. 그래서 정약전이 가진 가치관은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세대들에게 울림으로 다가오는 바.

“그 시대엔 이런 저서를 쓰는 사람이 흔치 않았을 거예요. ‘자산어보’의 원본이 없어요. 저도 카피본을 봤죠. 지금은 귀한 자료가 됐는데 그 시대는 홀대받았을 거예요. 어느 집의 창호로도 쓰였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일제강점기가 지난 후 필사본으로 남겨진 거죠. (약전이 살았던) 그 시대는 왕만 바라보고, 관료가 돼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는 게 중요했을 거예요. 약전은 ‘자산어보’를 피 토하며 썼을 거고요. 그 시대, 배척당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니었나 싶어 짠하기도 했어요. 여기밖에 관심을 둘 수 없는 약전의 처지가 있었을 거예요. 지금 와서도 크게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자산어보’에 대해 모르는 거죠. 가치가 더 높이 올라가야하지 않나 싶어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죠.”

설경구는 이준익 감독과 ‘소원’ 이후 8년 만에 재회했다. 이준익 감독과 다시 만난 소감을 묻자 돈독한 믿음을 드러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소원’ 후 다시 감독님과 해보고 싶었어요. 다짜고짜 ‘대본 주세요’ 했던 것처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죠. 변하지 않고, 똑같으신 게 너무 좋아요. 웃어른으로서가 아닌, 친구, 형, 때론 아버지 같기도 하고, 소년 같기도 하세요. 그런 모습들이 현장을 편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 같아요. 류승룡 배우도 ‘이준익 감독님의 현장은 참 행복한 것 같아요’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바로 이준익 감독님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기회가 된다면 다른 이야기도 감독님과 해보고 싶어요.”

[더셀럽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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